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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감수정과, 어른들을 위한 알약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7. 8. 4.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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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 시절, 계피사탕은 단맛에 쓴맛을 더한 아리송한 군것질거리였다. 내게 있어 사탕이란 단지 달콤함을 위한 존재였는데 계피사탕은 단맛보다는 쓴맛이 훨씬 더 강렬하였으므로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는 모순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왜 이런 걸 굳이 '사탕'으로 만든 걸까? 어른들은 그런 괴상한 것을 아무렇지 않게 먹으면서 그러지 못한 사람은 아이 취급하곤 했으니, 내 눈에 어른들이란 별 의미 없는 것에서 의미를 찾으며 상대방을 어린아이 취급하기 좋아하는 불합리한 존재일 따름이었다. 당시 난 어린아이였으므로 어린아이 취급 당하는 걸 부당하다 할 수 없었지만 겨우 계피사탕으로 그런 규정을 당한다는 게 영 탐탁지 않았다. 그래서 사탕을 고를 때면 항상 계피사탕을 저리 치워버리곤 했다. 계피사탕은 아이의 마음을 잃어버린 어른들을 위한 알약이었다. 난 내가 계피를 좋아하게 될 날이 오지 않을 거라 믿었다. 


수정과를 만들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많은 것이 새삼스럽다. 이제 와서 계피의 맛과 향이 그리워지다니. 이것은 어렸을 때의 추억이라면 안 좋은 것까지 모두 미화시켜 버리곤 하는 내 낙천주의의 발로일까, 아니면 단순히 나이가 들어 입맛에 변화가 온 것일까? 아니면 이제 쓴맛을 인생을 '제대로' 살아본 사람만이 능히 즐길 수 있는 훈장쯤으로 여기며 그 상패를 자랑스러워하는 얄궂은 어른이 되어버린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계피의 향이 거북하지 않게 되더니 이제 이름마저 예쁘다고 칭찬하며 수정과 만들기에 손수 나서고 있는 것이다.



2.

수정과는 '물에 담겨 있는 정과'라는 뜻으로, 이 말뜻에 의하면 수정과는 국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화채처럼 과일이나 과자 같은 것이 국물 안에 담겨 있는 음식이다. 조선시대의 요리책인 <시의전서>를 보면 '수정과'는 포괄적인 뜻으로, 그 아래에 곶감수정과, 배수정과, 산사수정과와 같은 구체적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난 지금껏 과일이나 과자가 담겨 있는 수정과를 먹어 본 일이 없었다. 내가 지금껏 본 수정과는 거의 국물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기껏해야 잣이 떠 있는 게 전부였다. 난 내가 어렸을 때 수정과를 싫어했던 건 어쩌면 잘못된 요리법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헛된 자만심과 과거 어른들에 대한 치기 어린 불신과 시중 음식점들의 무성의를 곱씹으며 재료들을 조리대에 꺼내 올렸다.



3.

계피 110g과 생강 120g을 꺼내어 계피는 솔로 청소하고 생강은 물에 불린 뒤 숟가락으로 껍질을 긁어냈다. 끌로 무른 나무를 다듬는 듯한 기분으로 생강 껍질을 모두 벗겨낸 뒤 얇게 저미었다. 각각 2리터의 물을 담아둔 냄비에 계피와 생강을 따로 넣어 충분히 끓였다. 그렇게 우려낸 국물을 면보에 거른 뒤 갈색 설탕을 1컵 정도 넣어 더 끓였다. 끓이는 건 시간에 맞추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맛에 기준을 두었다. 그릇에 준비된 국물을 담은 뒤, 미리 국물에 불려둔 상주 곶감을 다듬어 넣었다. 호두가 있었다면 곶감수정과의 최신 레시피라 할 수 있는 곶감쌈을 만들어 넣어봤을 텐데 아쉽게도 호두가 없었다. 마지막에 잣을 띄워 마무리했다.


솔로 정리한 계피. 2017. 8. 2.


곶감수정과. 2017.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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