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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고택, 어떤 마비 상태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7. 8. 2.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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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비를 와이퍼로 닦아가며 인적 드문 시골길을 달린지 수십 여분, 차량 네비게이션은 이곳으로 가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비좁은 골목길로 우리를 안내했다. 길이 너무 좁은데. 강판 지붕에 차가 부딪히겠어. 맞은편에서 차가 오면 안 될 텐데. 뭐 이런 곳에 우리 외에 다른 사람들이 있겠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던 찰나, 맞은편에서 차 한 대가 나타났다. 좁은 길을 후진으로 빠져나가고 싶지 않아 서둘러 피할 곳을 찾았다. 마침 왼편으로 조그마한 공터가 보였다. 간신히 서로의 몸을 비껴간 뒤, 우리 말고도 이런 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네, 하며 조심스럽게 차의 가속 페달을 밟았다. 그러나 몇 초 만에 다시 브레이크. 주차되어 있는 대여섯 대의 차량이 앞에 보였다. 아니 여기 웬 차가 이리 많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 순간 배롱나무와 마당 그리고 명재고택이 홀연, 느닷없는 신기루처럼 땅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뱃사람들이 전하는 귀동냥에 의지한 채 별 기대 없이 탐험에 나섰다가 보물선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의 충격이 이와 비슷할까. 기껏해야 몇몇 이들만 소문으로 알고 있어 찾는 이도 거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옛 시대의 유령선이 이미 보물지도를 손에 든 탐험가와 보물사냥꾼 들에게 선점당한 채 섬 한쪽에 정박해 있었다. 오래 방치되어 낡아빠졌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그 자체로 빛나는 데가 있어 당장이라도 마스트에 돛이 솟구쳐 오르고 선수로 올라온 선원이 저리 비키라는 수신호를 우리에게 보낼 것만 같았다. 보물사냥꾼들은 너무 늦게 도착한 우리 외지인에겐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자신들이 차지한 귀금속들을 만끽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저마다 손에 DSLR 카메라를 하나씩 든 채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고가의 물품들을 찾아 눈과 손을 분주히 더듬어댔다. 우리는 이미 배들로 가득 들어찬 선착장엔 들어설 수 없었기에 해안 가까이에 닻을 늘어뜨린 뒤 나룻배를 몰아 해변으로 향했다. 그래도 우리가 배에서 내릴 때쯤 비가 거의 그치는 좋은 전조가 나타나, 이곳에 아직 무언가가 남아 있을 거라는 희망 어린 기대를 고양시킬 수 있었다.


명재고택에서 내가 이렇게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은 건 단연 첫눈에 들어온 풍광 때문이었다. 사찰이나 조선시대 한옥이라고 하면 보통 부드럽고 점진적인 접근에 특색을 두고 있어서, 그에 속한 건물들이란 일주문이나 솟을대문을 지나 천천히 시야에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명재고택은 행랑채와 담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랑채가 정면을 향하고 있어 그 고매한 선이 아담하게 솟은 뒷산과 마당 양쪽의 배롱나무와 함께 한눈에 들어오도록 되어 있었다. 이 의외의 모습에 카메라를 든 내 손이 분주해졌다. 보물선은 폭풍우와 해무라는 시험대를 통과한 뒤에야 자신의 자태를 드러내는 법이니 궂은 날씨를 뚫고 도착한 이 비경을 무릉도원으로 여겨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이런 집에서 살면 참 좋을 텐데, 그렇지? 안쪽엔 당신이 좋아하는 중정도 있더라." 


해설을 들으며 안채까지 돌고 난 뒤, 우는 아이를 돌보느라 도중에 차로 돌아가야 했던 아내에게 돌아와 말해주었다. 그사이 날씨는 다시 궂어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비를 피해 사랑채로, 나무 아래로 모여들었다. "난 괜찮으니까 보고 싶은 거 있으면 더 보고 와." 아내의 말에 난 사랑채 기단석 위에 서서 돌로 만든 해시계를 다시 한 번 들여다 본 뒤 차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한 무리의 젊은 남녀들이 배롱나무 주변에서 누가 더 아름다운가 내기를 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좋을 시절이니 그들은 진짜 보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보물선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사실 명재고택은 보물선이 상상하게 만드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이 둘은 실상 반대편에 속하는 것이었다. 보물선은 야성과 환희와 모험심을 끓게 하지만, 고택은 그 끓어오름을 가라앉혀 정신을 차분함으로 인도하기에. 내가 이곳에서 보물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빛나는 보화가 아니라 우수에 잠긴 고요함이었다. 가까이 다가서지 않으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아주 나지막했던, 해설사분의 목소리를 닮은 잠잠함. 우리는 가는 빗소리에도 쉬이 잠기는 서로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귀를 기울이며 조금 더 다가서야 했다. 그렇게 서서,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우리는 명재고택을 한동안 내려다 보았다. 누군가는 갖을 수도 이룰 수도 없는 대상에 삶의 무력을 느끼고, 누군가는 '언젠가'를 다짐하는 소유를 욕구하며, 또 누군가는 풍경의 아름다움에 마비당하고 마는 고택이 저 앞에 놓여 있었다.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섬이 해무에 흐려지듯 고택이 빛의 충만함에 잠기었다.


명재고택. 안채 담장. 논산, 2017. 7.30.


명재고택. 상사화, 논산, 2017. 7.30.


명재고택. 연못. 논산, 2017. 7.30.


명재고택. 배롱나무와 사랑채. 논산, 2017. 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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