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의 자서전인 <말>의 실용적 가치는 이 책이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는 것에 있다. 사르트르가 자신이 어릴 적 신문과 책을 통해 체험했던 유령과 신비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나 역시 내가 어릴 적에 시내의 한 서점에서 즐겨 읽었던 유령과 괴물에 관한 책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당시 나는 삽화로 그려져 있던 서양 괴물의 형상에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자 하는 욕망에 얼마나 빠져 들었던가. 그가 어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또 어른스러운 척하기 위해 했던 온갖 행동들에 관해서 말할 때면, 내 마음 속엔 내가 또래의 아이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인 척하고 싶어서, 어른인척 하고 싶어서 했던 많은 행동들이 떠올랐다. 사르트르가 말을 마치자마자, 쉬는 시간이면 선생님들의 휴게실로 들어가 숨어 있었던 내 중학교 1학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덩치 큰 동년배들의 짖궃은 장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는데, 다른 방법이 아닌 그 방법을 택한 것은 어른들의 무리에 섞이고자 했던 열망 또한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들은 휴게실 문 옆에 몰래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여기서 뭐하느냐고 묻곤 했고, 휴게실의 탁자 주변으로 한데 모인 뒤에 '쟤는 다른 애들이랑 조금 다르다'는 식의 이야기를 수근대곤 하셨다. 난 그 말의 진위를 깨닫지 못한 채 스스로 우쭐거리는 마음을 키웠다. 당시 내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고, 그래서 선생님들은 내 태도에 특별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었다. 선생님들의 그런 차별적인 태도는 당시의 내가 특별하다는 생각을 더욱 가중시키곤 했다. 또 사르트르가 자신이 어렸을 때 쓴, 엉터리 자동기술법과 표절 기술을 이용하여 만든 소설에 대해 언급할 때면 나 역시 당시 내가 즐겨 읽었던 15소년 표류기나 로빈슨 크루소, 해저 2만리 같은 모험 소설을 본따 지어냈었던 여러 소설들을 기억해 냈다. 사르트르가 자신은 외동 아들이었기 때문에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그래서 공상에 빠진 채 가상의 세계를 꾸며 내곤 했다는 얘기를 할 때면 나 역시 혼자서 가상의 상대와 함께 바둑을 두거나 두꺼운 이불을 이리저리 굴곡지게 하여 거대한 산과 계곡이 있는 가상의 지상 세계를 만들어 놀던 기억을 되살려 낼 수 있었다.
그의 책은 내 추억의 좋은 불쏘시개가 되어 주었지만 한편으론 불편한 마음이 들게도 하였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특별한 사람이었고 특별한 사람답게 특별한 유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사르트르의 '팬'이 아니라면 그다지 관심 있어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가 써내려간 유년 시절의 기억은 흥미로웠지만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 했던, 또 어른에게서 칭찬을 받고 싶어 했던 한 어린 아이에 관한 기록에 대부분의 독자들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한 명의 연구자로서, 한 명의 가족으로서, 한 명의 추종자로서 사르트르의 유년 기록은 의미를 지니는 듯했다. 나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어릴 적 이야기에 나 자신 말고 누가 나만큼 관심을 가지려 하겠는가? 사르트르와 차이가 있다면 연구자와 추종자의 수가 나의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량이 아닌 범위로 한정을 하자면, 그의 기록은 다른 수많은 사람들 역시 똑같이 추억하고 있을 유년 시절의 문자화되지 않은 일상과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의 추억은 특별한데, 다만 사르트르는 오직 특별한 사람만이 지녔다고 믿겨지는 탄생 설화를 스스로 활자화시킬 줄 아는 뛰어난 능력을 지녔던 것이다.
오늘날 그의 글을 읽는 나는 어디에 속할까. 어쩌면 한 명의 연구자에 속할 것이고, 어쩌면 내 어린 시절의 유치찬란했던 기억을 일깨워 준 그의 공로를 기리는 한 명의 추종자에 속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지금의 이 추종자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자신에게 가장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족이 아니라 만나본 적도 없는, 먼 곳에 존재하는 한 사람의 독자, 한 사람의 관중, 한 사람의 추종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글을 쓰기 위해서 태어난 나는? 그렇다, 사람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181쪽)
사르트르의 이 자서전은 그가 그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 저녁 무렵이면 올라앉았던 횃대 위의 기억이었다. 신에게서 지명받은 자신의 짧지만 특별했던 삶이 인류의 기억에 영원히 남을 수 있도록 새긴 결과물이며, 그 욕망의 산물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 수많은 독자들을 위한 선물이었다. 인간이란 존재가 여전히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특별하다고 믿고 싶어하는 우리들은 이 한 사람의 특별했던 인간의 모습을 보며 감탄하고 싶은 것이다. 자 이 사람을 보라, 인간은 이렇게 특별한 존재이다, 라고. 그러나 사르트르가 생각한 그 사람이 꼭 100년 뒤의 어떤 독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어려운 한 가지 가능성에도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바로 가족이라는 이름의 독자, 가족이라는 이름의 '팬'.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응원해줄 것 같으면서도 실은 가장 먼저 그 이질성을 파악하고 마는 존재. 그의 자서전을 읽으며 나는 생각한다. 그도 예외는 아니었을 거라고. 그러니 사르트르의 <말>은 실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 그러나 그를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존재들을 위해 그가 만들어 낸 횃대 옆의 둥지였으며, 이제는 모두가 떠나버리고 주변인들만이 찾아와 '저기가 바로 그곳이었데', 라고 속삭이는 새장 속 빈 둥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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