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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무질 <특성 없는 남자> (1), 매몰된 자원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7. 1. 7.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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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내가 읽은 모든 책들을 요약해서 정리해 두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며칠 전에 오래전 정리해 두었던 <특성 없는 남자>의 요약본을 다시 읽다가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이런 소설을 써냈으면서도 (비록 평단의 인정을 받기는 했지만) 당대의 대중으로부터 어떤 인정도 받지 못한 채 죽어 갔던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 느끼는 감정은, 이런 책이 어떻게 발굴되어 출판에 이르게 되었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이 책은 초반부터 펼쳐지는 강렬한 자극도, 화려한 묘사도, 유혹하는 호기심도 없다. 이 책은 독자를 갑자기 확 잡아끄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끌고 들어간다. 그렇기에 이 책은 앞부분만 헤진 채 내던져지기 십상인 운명에 처해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유쾌하고 재미있고 자극적인 소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시절에 이 책이 어떻게 여전히 살아남았단 말인가? 게다가 살아남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어떻게 20세기에 발표된 가장 중요한 독일어 소설로 꼽히게 되었단 말인가?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소설은 카프카의 <소송>을 제치고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독일어 소설 1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카프카의 소설은 책의 첫 장부터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가 있기라도 했다. 그렇지 않은 이 소설이 살아남았다는 것, 출판 금지 서적으로 지정되기 이전에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이 소설을 결코 알지 못했을 테니. 한 장 한 장 책을 넘겨 가다 보면, 어느 고비를 넘어서게 되면, 로베르트 무질이 꼼꼼히 적어 넣은 문장들이 결코 쉽게 지나쳐선 안 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속독을 하듯 마구 읽어 내려가면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지만, 문장 하나가 말하는 바를 생각하며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길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감지하게 된다. 내가 위대한 문학 작품과 조우했다는 사실을. 이 소설을 출판하기로 결심한 출판사와 번역자의 결단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얼핏 보아선 초판을 넘기기 힘들 것 같은 이 소설, 게다가 미완성으로 끝나버린 이 소설을 출판하기로 결행한 것은 손해를 감수한 결정이었을 게 분명하다. 로베르트 무질이 <특성 없는 남자>에서 암시했듯이, 천재들이 많은 나라는 "그것 때문에 점점 멸망해가고 있는지도" 모르며, 그 운명은 천재의 책, '너무 독창적인' 책들을 내는 출판사에게도 이어지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후대에 살아 남았으며 단순히 살아 남는 것에 그치지도 않았다. 그의 말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다분히 전하는 바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시대에는? 더 이후에는? 그것은 알 수 없다. 그가 살아남을 것은 분명하지만, 시대는 점차 무거운 것을 멀리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이미지에 노출되어 있고, 이제 단순한 구독자가 아닌 이미지의, 더 나아가 텍스트의 생산자가 되길 원하고 있다. 다른 세계에 관한 오랜 읽기보다는 자기 입장에 치중하는 작은 독백이 늘어가는 현대 세계를 이 깊고 느린 총체적 사유의 텍스트가 이겨낼 거라는 낙천적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특성 없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오늘날의 세계에서 더욱 이질적으로 드러나는 바가 있었다. "갑자기 수면제를 먹은 것처럼, 삶은 굳어진 채 내면으로 가득 차 날카롭게 경계를 이루고 서 있었지만, 결국 전체적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41쪽)음을 느끼는 군상들에게 이 작품은 갈수록 더 커다란 메시지를 던진다(그러나 그들은 이 책을 읽지 않는다). 따라서 그와 그의 작품은 왼전히 매몰되기보다는 잔해로 남을 것이며, 잔해로 남기보단 지하 깊은 곳의 새로운 자원으로, 새로운 경계로 먼 훗날 재발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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