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 어두운 숲에 처했었네. 1
― <신곡> 지옥편
도시를 여행하는 우리의 손은 한갖 지상에서나 의미 있는 온갖 짐에 묶여 고통 받곤 했다. 여행가방과 잡동사니 들은 바닥을 쓸고 가는 우리의 죄 많은 영혼처럼 우리의 두 손을 잡아끌었으니, 우리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새로운 도시의 전경이 아니라 잠으로 시간을 탕진할 숙소를 찾았던 건 그 덧없는 것들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던 일시적인 몸부림이었다. 베네치아에서 피렌체로 기차를 타고 2시간여, 목적지에서 내린 우리는 무채색의 하늘이 바닥을 내리누르는 넓은 광장에 섰고, 그곳에서 세계의 광대함과 복잡함에 새삼 혼미함을 느끼며 미리 알아 둔 숙소의 위치를 찾으려 애썼다. 그곳은 역에서 멀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인생의 새로운 시점에 접어드는 사람들이 항상 그렇듯, 낯선 도시에 접어드는 방문객들은 같은 길을 맴돌고 만다. 패키지 여행을 하면 그런 점이 좋지, 헤매지 않아도 되거든. 평범함의 진리가 다가와 충고했다. 앞서 가는 안내자의 깃발만 따라가면 되는데 왜 그 편한 길을 마다하는 거야? 뒤에서 따라오던 끌려가는 삶이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어렵사리 찾은 숙소에 대충 짐을 던져 둔 우리는 다시 역 앞 광장으로 갔다. 광장은 출발점이 되기에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광장에 서면 도시가 품은 공간을 멀리까지 볼 수 있다. 난 광장에 선 채 내가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나 역시 노출됨을 생각하지 않은 채. 광장 속 수많은 사람들이 바삐 걷는 모습을 보며 이 모든 걸 목도하는 자는 오직 나 하나라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그 환자의 눈에 갈색톤의 평범한 고딕 성당이 하나 보였다. 광장 바로 앞에 위치한 성당이었다. 그 성당은 거대한 광장 앞이라는 훌륭한 입지 조건에도 불구하고 받아야 할 응분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 광장은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그저 지나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성당 앞에는 기차역이 있었고 그 기차역은 광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제 그 광장은 자동차들이 수시로 감시의 눈을 보내는 거대한 도로에 구금되어 있었다. 게다가 광장과 성당 사이에는 그들을 더 극적으로 이반시키는 지상 전철까지 놓여 있었으니, 모두가 정신없이 움직이는 와중에 이 성당은 점차 초라해지고 더 왜소해졌다.
괴테는 팔라디오가 세운 비첸차의 건축물이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다소 침울하게, 다소 유감스럽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사람들의 내적인 욕구를 고양시키려 시도하면 그들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듣지 못하는 반면, 그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며 매일 그들의 상황을 악화시켜 주면 그들과 한편이 된다고 말이다. 광장과 기차와 전철의 혼란 속에 떠돌던 그 성당,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대한 나의 우울한 관점 역시 사람들의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위대하다고 불리는 자의 말을 빌려 쓰는 것을 용서하라. 그들의 화살을 막을 방패막이가 내게도 필요하다. 괴테마저도 자신이 친구들을 깎아내리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며, 세상일이란 다 그런 것이니 정당한 평가에 비난이 돌아오더라도 놀랄 일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해야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괴테는 세상의 이치가 그렇다는 걸 직접 눈으로 보고 겪으며 즐거움을 느꼈으니, 이번엔 유리 장수에게 화분을 던진 뒤 미친 듯이 외쳐댔던 보들레르의 시를 빌어 보자. "삶을 아름답게! 삶을 아름답게!" "일순간 속에서 향락의 무한을 보아버린 자에게 지옥 징벌의 영원함이라 한들 무슨 대수인가?" 2 결국 관점이란 자신을 위해 그때마다 방향을 바꾸며 흔들리는 조타기가 아니었던가? 3
이제 몽상을 멈추고 삐쭉 솟은 첨탑 하나를 가진 이 오래된 성당, 그 이름도 찬란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으로 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자동차와 전철을 피해 길을 건넌 뒤 입장표를 구하기 위해 성당 입구에 줄을 섰다. 그곳엔 벌써부터 죽음의 증거들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 수많은 석관묘가 바닥에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묘소가 아닌 단순한 바닥 장식처럼 보였다. 실제로 난 그것들이 무덤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 했다. 겨우 한 발 너비의 석관에 인생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꼴이라니! 저 조그만 무덤을 위해 우리는 그토록 잔인한 경주를 해왔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읽어 보지 않는데도?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들어선 순간 우리는 호모 비아토르, 순례하는 인간이 되었고, 그렇기에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미 진술했던 바대로 성경의 어휘들과 성유물들을 은유적 의미로 파악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직관으로 알아낼 수 있다는 신념을 고집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 텍스트에서 은유를 파악하듯 서로의 표정과 태도와 대화에서 조금씩 엿볼 수 있는 내면을 파악하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난 순례하는 자가 아니라 그저 궁금해 하는 자에 머물렀다. 그리하여 이집트에서 탈출하던 유대인들의 '신성한 도둑질'처럼 나는 이 중세의 신전 입구에 선 채 내가 앞으로 무엇을 훔칠 수 있을지, 그것이 내게 어떤 도움이 될지에 골몰했다.
태양이 난바다의 항해에 나서고 어둠이 귀향길에 오르면, 불량한 무리들이 서서히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 오기 마련이다. 중세인들은 그들을 막기 위해 강을 가로질러 쇠줄을 치고 성벽의 문을 닫았지만 어림없는 행동이었다. 약한 자를 위해 열어 두었던 성당으로 이들이, 마치 자신들을 위한 광장인 양 들이닥쳤다. 풍부한 약탈거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약탈자인, 신성한 도둑질을 재현할, 하지만 예의바르게 입장의 대가를 지불한 내가 왔다. 입장표를 받아든 나는 흑사병을 피해 도망쳤던 사람들이 모여 기도 드렸던 이 성당, 데카메론의 이야기가 펼쳐졌던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육중한 입구를 맹렬하게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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