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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피치 미술관 (2) - 모순의 공간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6. 12. 8.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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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의 머리>를 보며 순간적으로 느꼈던 감정은 그 영향 탓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미 생각보다 너무 많은 시간을 써버린 터라 우피치 미술관의 뒤쪽 전시실에 이르러서는 쫓기듯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그림들을 신경 써서 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카라바조의 <메두사의 머리>는 바삐 움직이던 내 발걸음을 순간적으로 멈춰서게 하는 데가 있었다. 그 그림에선 기존엔 잘 느낄 수 없던 색다른 힘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16세기 이탈리아 회화의 중심 축 중 하나였던 매너리즘(마니에리스모)이 오늘날 부정적 의미로 쓰이는데 일조한 사람 중의 한 명으로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술사학자인 곰브리치가 대중적으로 지목되고 있다.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에서 당시 화가들이 기존 선배들의 화풍을 그대로 답습하는 데 만족했기 때문에 후대 비평가들로부터 매너리즘의 시대라는 평을 받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 글에 '미술의 위기'라는 제목을 달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곰브리치 역시 매너리즘을 부정적으로 평했던 당시 비평가들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사실 곰브리치는 매너리즘의 대표적인 화가인 파르미자니노를 최초의 '현대적 미술가' 중의 한 명이라 평하였고, 더 나아가 매너리즘 화가들이 당시에 전혀 이해받지 못하다가 1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했다고 썼다. 곰브리치가 말한 '미술의 위기'는 매너리즘이 초래한 것이 아니라 매너리즘을 태동시킨 것이었다.

 

당시 매너리즘 화가들이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선배 대화가들, 즉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가 완성시켜버린 화풍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완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의 결과물은 기이하다며 곧바로 비판받았다. 이것은 오늘날의 여러 색다른 시도가 받고 있는 비난과 비슷했다. 내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이상적인 미를 바라보며 보냈던 찬사는 내가 실제의 삶에서 추구하고 싶었던 이상향에 대한 헌사와 같았다. 그러나 보티첼리의 고전적 미에는 인간의 아픔과 고뇌가 없었다. 신들의 승리, 이상화된 인간미만 그려져 있었던 그 그림처럼 나의 이상은 현실에 놓여 있는 실제의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내가 의식적으로는 그 숭고한 미를 따르는 척하다가고 곧 잊어버리고 말았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마니에리스모(매너리즘)적 미는 어렴풋이 가려져 있는 영혼의 고뇌를 표현한다"라고 했던 움베르토 에코의 평가는 조금도 이상할 게 없었다. 완벽한 비례와 계산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던 당시 화풍은 인생을 유년시절부터 은퇴 이후까지 미리 설계한 뒤 그를 토대로 계획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랐던 부모들의 욕구와 닮아 있었고, 그 욕구는 예술을 넘어 인간의 삶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즉 신의 이상을 형상화했던 당시 패널화처럼 삶을 완벽하게 조직하려 했다. 나 역시 그런 이상화에 물들어 그것이 옳다고 믿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 세계가 나를 오래 지배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매너리즘을 오해하고 비난했던 당시와 오늘의 편협한 관점이 왜곡된 미의 기치 아래에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영혼의 고뇌가 담긴 새로운 시도는 기이하다는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보장된 성공이라는 이상적 세계에서 변방으로 향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실제의 나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투영하는 이상적 미는 거부하면서도 내가 타인을 바라볼 때에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미를 그가 그려낼 수 있길 지독하게 원했던 것이다. 피렌체 공화국은 동쪽으로 투르크의 위협을, 서쪽으로 프랑스의 침입을, 북쪽으로 종교개혁의 기운을, 그리고 내부적으로 과학의 공세를 받으며 서 있었고, 나는 우피치가 만들어 낸 그 복잡한 세계의 투시경 안에서 이중적 욕망을 숨긴 채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카라바조의 메두사를 보고 돌로 변하기는 커녕 오히려 표정에 생기를 띠웠으니, 그것은 내 모순된 욕망의 결정적 증거물이었다. 난 그 앞에 멈춰섰고 곧 즐거워졌다. 그리하여 메두사의 얼굴에 카라바조가 아닌 내 얼굴의 그려넣은 뒤, 애써 고개를 돌리고 있는 관객들을 향해 그 환영의 머리를 무정하게 들어 올리고 말았다.

 

카라바조, <메두사의 머리>, 1598년경.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티치아노는 물론 미켈란젤로의 후기 회화에서도 매너리즘의 경향이 보인다는 것이 오늘날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현대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매너리즘 화가들에게서 자신들의 경향을 엿보았다. 파르미자니노, <목이 긴 성모>, 1540년경.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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