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건, 이야기 모두를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팩츄얼드라마(factual drama) 장르를 대한민국 최초로 도입해 보다 사실적이고, 생생한 임진왜란 이야기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한다."
이것은 KBS <임진왜란 1592> 제작진이 밝혔던 큰 포부이다. 46전 46승 무패라는 전세계 해전 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임진년의 싸움에 대한 사실적 재현. 2016년 9월, KBS1에서 총 5회분으로 방영한 팩추얼 드라마 <임진왜란 1592>는 그런 설명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고자 했다. 이순신 장군보다도 더 대사가 많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각, 모든 등장 인물들의 각 나라 언어 사용과 실제 중국 및 일본 출신 배우 섭외, 귀선(거북선)의 자세한 전투 장면 묘사. 여러 면에서 <임진왜란 1592>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팩추얼'이라는 강조가 눈에 띠었기에 드라마에서 묘사된 여러 장면들에 더욱 관심이 갔다. 중국 병사들이 조선인을 만나 길을 물을 때 어눌한 조선어를 사용하는 명나라 통역사, 조선 팔도의 사투리가 달라 번역에 고생하는 일본인의 묘사는 압권이었다. 이런 것을 보면 이 드라마가 얼마나 사실성에 관심을 가지고 제작에 임했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부분은 어떨까?
1.전적에 관한 기록
<임진왜란 1592>는 이순신 장군의 전적이 '46전 46승 무패'라고 알린다. 숫자가 나오면 그 관심은 쉽게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데, '저 숫자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과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전적을 '23전 23승 무패'라 표현했는데, 대중의 큰 관심을 받은 드라마였던 탓인지 23전 23승이라는 이순신 장군의 해전 기록은 곧 인터넷상에서 마치 정설처럼 굳어져 버렸다. 인터넷에서 23전 전승에 대한 해전 목록을 찾아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기록은 학자들마다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 이순신 장군의 전투 횟수를 이형석 교수는 18회(1974년), 최두환 교수는 26회(1998년), 이선호 교수는 27회(2001년)라고 주장한 바 있다. 최근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던 제장명 교수는, 과거 학자들간 해전 횟수 기록이 다른 이유가 학자들마다 해전의 정의와 범위를 달리 했기 때문이라 밝혔다. 따라서 제장명 교수는 먼저 정의를 바로 잡은 뒤 해전 횟수를 다시 조사하였다. 그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이 참여한 해전의 기록(명나라와의 연합 전투 포함)은 '45전 40승 5무'이며, 이중에 이순신 장군이 직접 지휘한 전투의 전적은 36전 36승 무패이다. 따라서 <임진왜란 1592>에서 말하는 46전 46승은 명군과의 연합 작전을 포함한 것으로 보이며, 전투의 승부를 바라보는 관점은 기존의 입장을 따른 것 같다. 1
2. 철갑선의 진실
<임진왜란 1592>는 팩추얼 드라마라는 설정을 강조했다. 즉 사실에 기반한 드라마라는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신경 써서 복원한 것이 거북선이다. 그 사실성이라는 것도 결국 추론의 결과물이지만, 그래도 지금껏 보여진 거북선 모형들 중 가장 신빙성이 있는 토대를 바탕으로 거북선을 구현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1592>에 등장하는 거북선이 지닌 차별성 중 하나는,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가정을 깨트렸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거북선은 철갑선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거북선을 철갑으로 둘렀다는 기록, 특히 거북선의 지붕 부위를 철갑으로 보호했다는 기록은 당대의 어느 문서에도 나와있지 않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이순신 장군의 조카인 이분이 쓴 <행록>을 보면 거북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대여판옥 상복이판 판상유십자형세로 이용인지상행 여개삽이도추." 풀어쓰자면 "판옥선과 비슷한 크기의 전선을 판자로 덮고 그곳에 도추(칼과 송곳)를 꽂아두었다"는 것이다. 즉 철갑을 둘렀다는 표현은 없다. 마찬가지로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에도 철갑을 사용했다는 표현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2
거북선을 철갑선이라고 묘사한 기록은 전부 임진왜란 한참 이후의 문서들에서 나왔다. 일본의 <정한위략>, <지마군기>, 그리고 구한말 선교사인 헐버트가 쓴 <대한제국멸망사>가 대표적이다. 특히 일본에서 작성한 <정한위략>(1831년)에는 "적의 배중에 온통 철장갑을 씌운 것이 있어 우리 화포가 깨트릴 수 없었다"라는 구절이 있어 거북선이 철갑선이었다는 강력한 근거로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그 구절이 실은 <정한위략>의 편찬자가 일본 수군이 패한 경위를 설명하면서 인용했던 <고려선전기>의 한 대목이라는 게 밝혀졌다. 3
네이버에 수록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거북선' 항목에 따르면,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유래는 구전적 전승에서 비롯한다. 철갑선에 대한 당대의 기록은 전무하여 남은 것이 없고 후대의 기록만이 남아 있는데, 그 후대의 기록들이 모두 사람들의 구전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저자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주장을 상당히 긴 서술을 통해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붙인다 해도 구전의 내용을 철갑선의 근거로 삼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전승이나 사료에 근거하지 않고 당시의 전투 상황을 기반으로 거북선이 철갑선이었을 거라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우선 거북선이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적의 총탄을 막아내기 위해선 단단한 철갑을 둘렀다고 가정하는 것이 옳으며, 거북선 지붕이 나무로 되어 있으면 적의 불화살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기 때문에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철갑을 둘렀을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거북선은 단단한 소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4(<임진왜란 1592>도 돌격장 이기남의 대사를 통해 그 점을 밝힌다) 조총에 쉽게 뚫리지 않았을 것이며, 일본 수군은 화공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방비할 필요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5 사실 당시 기술로 보면 지붕에 철갑을 두르는 것보다 두르지 않는 편이 더 나아 보인다. 지붕을 철갑으로 두르면 기동성이 떨어지고, 배가 기울어졌을 때 복원이 쉽지 않으며, 쉽게 녹이 슬어 관리가 어렵다. 칼과 송곳을 꽂기에도 철보다는 나무가 편했을 것이다. 6 7
이러한 논의는 거의 대부분이 가정에 의한 것이라 어느 한쪽만이 옳다고 하기는 어렵다. <임진왜란 1592>는 거북선을 장갑선, 즉 등판에 나무판을 씌운 배로 보는 게 보다 사실적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그렇다고 철갑선의 가정을 터무니없다고 하기도 어려우니, <임진왜란 1592>에서 복원한 거북선만이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거북선이 2층 구조인가 3층 구조인가도 여러 논박이 오가는 주제이다. 기존에 묘사된 거북선은 대부분 2층 구조를 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 1592>는 3층의 구조를 택했다. 그 점은 드라마 내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귀선, 즉 거북선의 3층을 포군실, 2층을 격군실, 1층을 노를 젓는 공간으로 나눈 뒤 각 층을 자막으로 명확히 나타냈다. 거북선 3층설은 이제 추정이 아니라 거의 확실시 되는 분위기이다. 8
거북선이 철갑선이 아니었으며 또한 3층 구조였을 거라는 가정을 따른 것을 보면, <임진왜란 1592>가 조선시대의 기록보다는 당위성에 맞춰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이충무공전서>에 따르면 거북선은 2층 구조이기 때문이다. 9
과거엔 거북선의 용머리에서 유황과 같은 연기를 뿜어냈다는 식의 묘사가 많았으나(이 역시 <이충무공전서>의 기록에 나온다), <임진왜란 1592>는 용머리 입에서 화포를 발사하였다는 <임진장초>(이순신 장군이 직접 남긴 장계)의 기록을 따랐다. 그래서 드라마에 나오는 거북선의 용머리는 갑판과 수평인 형태로 묘사되었다.
4. 화포는 원거리 공격이 아닌 근접 공격
<임진왜란 1592>의 특별함은 바로 화포를 이용한 전투 방식의 차별성에 있다. 기존엔 판옥선에 실린 총통으로 공격 시, 원거리 공격을 했을 거라 추정했다. 화포의 긴 사거리를 충분히 이용했으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1592>는 이순신 장군이 포를 원거리에서 곡사로 발사하게 하기보단 근거리에서 직사로 쏘게 했을 거라는 추정을 따랐다.
바다 위에서 포를 발사할 때의 문제점은 드라마에서도 잘 묘사되고 있다. 아주 멀리 떨어진 적을 맞춰야 한다는 어려운 조건(조선시대 총통에는 조준 장치가 없었다)에 파도의 흔들림까지 더해지기 때문에, 드라마 속 이순신 장군은 원거리에서 총통을 쏴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조선시대 화포는 화약과 탄환을 각각 준비해야 했으므로 재장전하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첫 발로 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상황에서 재장전하는 데 오랜 시간을 보내다가는 빠른 이동이 특기인 일본의 함선에 역공을 당했으리라는 게 당위적 생각이었다. 그래서 드라마 제작사는 이순신 장군이 아마도 '첫 발'부터 적에게 충분히 접근한 뒤 직사로 직접 타격했으리라는 가정을 했으며, 그 모습을 드라마에 충실히 구현했다.
임진왜란 당시 근거리에서 화포로 직사 공격했을 거라는 추정이 단순히 상상의 산물만은 아니다. 조선 후기 수군들의 훈련방식을 기록한 <수조홀기>를 보면, "적신이 200보 사이에 접근하면 총통을 발사"하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는 그보다 더 가까운 100보 이내로 접근 시 직사 타격한 뒤, 곧바로 판옥선을 180도 선회시켜(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하여 선회에 유리하였다) 재장전 대기 없이 연속 사격하는 것으로 그렸다. 이런 근거를 바탕으로 화포의 직사 공격을 영상으로 자세히 표현한 것은 <임진왜란 1592>가 최초의 일이다. 10
5. 환도의 패용 방식은 과연 잘못되었는가
이 드라마에서도 조선시대 병사들이 칼을 '손에'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병사들이 칼을 손에 들고 다니는 장면은 고증 오류로 자주 지적되어 왔기 때문에 <임진왜란 1592>에 나온 그 장면 역시 고증 오류라 지적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18세기 회화로 추정되는 <동래부사접왜사도>를 보면 조선 무사들이 칼을 손에 들고 있는 게 아니라 칼날은 아래로, 손잡이는 뒤로 한 채 칼을 패용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다른 그림이나 사진을 통해서도 비슷한 패용 방식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칼을 손에 들고 있는 드라마 속 조선 병사들의 모습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타국의 사절을 맞이하는 공식 행사 시의 무사 복장이나 성문에서 중요한 임무를 띤 채 군무를 보는 병사들의 복장이 실제 최전방에서 근무했던 많은 병사들의 복장이 똑같았을 거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오히려 제대로 된 복장을 갖추지 않았을 거라고 가정하는 것이 당시 상황에 맞을 수 있다. 칼을 제대로 패용하는 데에는 많은 부품이 필요하므로, 군비가 부족했던 당시 상황에 현장의 말단 병사들까지 패용에 필요한 모든 부속품을 챙겨 칼을 착용하진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급한대로 칼만 손에 들고 다녔을 거라고 가정하는 게 더 당위성을 띤다. 그러므로 <임진왜란 1592>에서 병사들이 손에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이 고증 오류라 지적하는 것은 다소 과한 논리라 볼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을 그려내는 드라마나 소설은 항상 이순신 장군의 인간미, 학자적 풍모를 그려내기 위해 애썼다. <임진왜란 1592>도 예외는 아니다. 이순신 장군이 전투에 참여했던 병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록하여 임금께 장계를 올리는 모습은 그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임진왜란 1592> 제작진은 공식 홈페이지에 단역 배우들의 이름과 사진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올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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