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베르트 무질은 <생전유고>의 서문에 "무심하게 제시되어 있는 작은 특징들에서 인간의 삶을 관찰하고, "기다리는" 감정들에 몸을 맡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선견지명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17쪽)라고 썼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겸손한 표현이다. 파브르도 <곤충기>에서 자신의 끈기 있는 관찰 능력을 바탕으로 여러 기록을 남겼는데, 조금만 봐도 무질이 드러내는 관찰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관찰을 통해 '작은 특징들'을 발견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에서 논리적 추론 끝에 새로운 발견을 해내는 것은 과학자의 일이며, 그것에서 인간의 삶을 연상해내는 것은 철학자와 예술가의 일이니, 그것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선견지명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터져 나오는 그 순간까지 "아무 할 말이 없는" 듯 보이는"(17쪽) 것들에서 인간과 연관된 무엇을 써내려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삶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천천히 점진적으로 커지는 게 아니라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갑자기 터져버리며, 한 번 터지고 나면 그간 별 문제 없었던 것들마저도 엄청난 말들을 쏟아내도록 자극하니, 비록 평온한 듯 보이지만 어떤 역린을 건드릴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세계에 던져져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인 것이다.
난 이 책의 서문을 몇 번에 걸쳐 읽었다. 졸음이 쏟아지곤 하는 지하철에서 읽은 탓도 있었지만, 책의 마지막이 아니라 제일 처음에 서문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써넣은 까닭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저자의 그 의도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면 이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지하철에서 몇 번 그리고 집에서 반복하여 읽은 끝에 이 서문에서 로베르트 무질이 지닌 작가로써의 자긍심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래 전에 쓴 글들, 나 자신과 내 친구들만을 위해 썼던 글들,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이때에 사소한 일들이나 그저 짧은 관찰에 불과한 자신의 글을 출판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오래 전에 쓴 글들을 출판을 위해 개작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들---그는 서문에 이 책을 출판하기까지의 그런 고민들을 담았으며, 결과적으로 예전의 것들을 단 하나도 바꾸지 않은 채 출판하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작은 실수에 대한 비판이 훨씬 더 큰 실수가 저질러지는 시대에도 가치를 잃지 않으리라는"(18쪽)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불행한 삶을 살았으나 자신의 글이 세계에 던질 가치에 의미가 있을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는 자기확신에 차 있던 천재였다.
2.
로베르트 무질의 표현법은 다른 작가들에게서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특별한 데가 있었다. 다소 시적이라고 해야할 그 특별함은 대상을 관찰할 때 감입되는 놀라운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더럽고 불결하며 때로는 불길한 기운을 주는 곤충인 '파리'가 끈끈이에 붙잡혀 버둥대는 모습을 묘사한 단편 <파리잡이 끈끈이>를 보라. 썩은 유기물에서 태어나 병을 옮기며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이 파리를 인간의 형상으로 묘사한 장면들을 읽으며, 나는 로베르트 무질이 대수롭지 않게 써나간 그 문장들이 실은 인간의 고통과 소름끼치게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파리가 끈끈이에서 버둥대는 그 모습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나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묘사되어 있는 지옥보다도 더 충격적인 데가 있었는데, 미켈란젤로나 단테는 그 세계가 지옥이라고 알렸지만 로베르트 무질은 눈앞의 파리를 허우적거리게 만들어, 저 진창 같은 곳이 아득한 사후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 우리의 현실에 대한 모사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모사는 <발트해 연안의 어부들>에서 지렁이가 여러 조각으로 찢겨 낚시바늘에 찔리는 묘사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푸른 하늘 맑은 공기 아래, 한 걸음 떨어져 보면 행복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극적인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고 있음을 무질은 단조롭게---그래서 반사회 인격장애자의 무덤덤한 살인처럼 더 가혹하게---드러내고 있다.
무질의 상상력은 그곳에서 멈추지 않았다. 석관이나 목관 뚜껑을 직간접적으로 보아온 많은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독자들 중, 뚜껑에 새겨져 있는 남녀 한 쌍의 모습을 보고는 그들이 살아 있을 때의 움직임과 눈길의 마주침을 연상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게다가 그들이 우리를 외면하거나 눈을 내리깔지 않기 때문에(그들은 조각이기 때문에 당연히 눈꺼풀을 움직일 수 없다) 돌이 되지 않고 오히려 인간적이 된다고 선언할 수 있는 자는 몇이나 되겠는가? 그 문장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자는 과연?
로베르트 무질은 인간사에서 펼쳐지고 있는 이중주를 주목하고 있는 듯하다. 그 이중주는 이념이나 전쟁처럼 거대한 것을 다루지 않는다. 우리의 흔한 취미, 사소한 잡일에서 그는 생과 사의, 선과 악의 묘한 협연을 발견한다. 그런 악한 요소들의 개입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 협연은 너무나 절묘하여 우리에게 하나의 음악처럼 들리니, 그 연주에서 악을 빼버리면 오히려 우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런 소음을 당장 집어치우라며 소리를 지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그는 담담히, 한 명의 관찰자로서 기록한다. 조금은 가슴 아프게, 곧 바람이 지워버릴 작은 외침을---잔인하게 물린 토끼와, 야성의 행복에 가득찬 폭스테리어와, 그들을 쫓고 쫓기게 만든 방관자와 구경꾼들의 웃음을---"해골같이 누런 풍화된 모랫둑들이 바위 왕관처럼" 놓여진 흰 종이 위에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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