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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무질 <생전유고> (3), 나는 나에게 경탄한다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6. 9. 11. 18:23

본문

1.

다수의 사람들이 몰려가 소수의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행위엔 유행을 따르려는 심리가 있는 듯하다. 로베르트 무질은 <망원경으로 보라>에서 인간의 역사를 축사의 몇 안 되는 방에서 이리 몰려갔다 저리 몰려가는 가축에 비유했는데, 인간이 그렇게 누군가를 따라 아무런 생각없이 몰려가는 행위를 그는 유행이란 이름으로 정의했다. 이것은 단순히 패션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이때 그가 '역사'라는 단어를 언급했던 바대로) 인간사에 걸친 많은 것들에 대한 지목이다. 교육 방식에서 집과 자동차의 선택뿐만 아니라 직업의 결정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명확한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향하는 곳을 그저 같이 따라가려 한다. 어째서일까? 심지어 한 학급에서 누군가를 따돌리기 시작하면 그것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다수가 동조하려는 것은? 내가 로베스트 무질의 의도를 확장하여 유행과 사회 문제를 결부시키려 하는 것이 그리 정당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행위들은 배제에 대한 두려움, 타인의 시선에 대한 민감한 의식, 그리고 속물근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교집합을 이룬다. 대개 유행이라는 용어는 보편적, 항구적 가치에 반하는 것들에 사용된다. 유행의 따르는 것은 그것이 가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며, 언제나 그렇듯 다수가 항상 올바르지는 않다.


한 가지 위안을 던지자면, 그것이 단순한 유행인지 아니면 거대한 시대의 흐름인지 파악하는 능력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추고 있지 못하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도 그렇다는 사실은---바로 유행의 속성처럼---우리에게 위로를 안겨준다. 


2.

그런데 내가 바로 윗 문단에 쓴 표현은 실은 빈정거림과 다를 바 없다. 다른 사람과 같다는 것에서 안정을 얻으려는 심리를 비판하고 나서는,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행동하므로 괜찮다고 말하다니! 하지만 이런 식의 비아냥을 곧바로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로베르트 무질의 <생전유고>에 포함된 여러 풍자글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가 저런 식으로, 대중의 눈에 너무나 불친절하게 글을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는 그가 스스로 이야기했던---글쟁이가 아닌---'작가'의 위치를 확립할 수 있었다. 그의 글은 뻔한 소재들을 조금씩 다르게 뒤섞어 반복하는 유행 드라마가 아니었으며, 그렇기에 어느 순간 예측치 못한 경탄을 불러내었다. 이것이야 말로 천재의 글이라는 경탄 말이다. 


3.

그런 방식으로, 이 천재는 자연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리에도 유행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가령 로베르트 무질은 <아름다운 숲이여, 누가 너를......?>에서 사람들이 숲을 바라보며 아름답다 칭송하는 그 고질적 행위를 풍자하였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칭송의 행위에서도 유행의 속성을 엿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숲을 보며 아름답다고 외친다. 하지만 그 숲이 개개의 나무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하며, 개개의 나무들이 서로 햇빛과 땅을 차지하기 위해 지금도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한다. 또 과거 다른 품종의 나무들이 서로의 씨를 더 넓히기 위해 전투를 벌였으며 지금 숲을 이루고 있는 품종은 그 잔인한 전투의 승리자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다. 더 나아가 당신이 사용할 나무 의자를 만들기 위해 숲이 벌목된 뒤 어린 나무로 채워졌으며,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신이 아니라---새로 심길 나무들의 배치에 관여했다는 것 역시 인식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숲을 바라보며 흥에 겨워 외친다. "아름다운 숲이여, 누가 너를 거기 그 위에 그렇게 우뚝 세워놓았지?" 숲을 보며 감상적으로 외치는 그 질문에 대한 실질적 대답은 무미건조하게도 '산림청 직원'일지 모르는데도.


위의 전개엔 다소 억지스러움이 있다. 하지만 <아름다운 숲이여, 누가 너를......?>이 풍자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렇게 풍자성이 있기에 그의 글에 놀라운 뒷맛이 남을 수 있다는 걸 감안해야겠다. 내가 찾은 그 뒷맛은 유행을 따르는 속성에 진지함이 결여된 것처럼, 우리가 숲을 보며 탄성을 내지르는 그 행위에도 진지함이 결여되어 있다는 공통성의 발견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떤 장관에 감탄해서가 아니라, 그저 감동받고 싶어서 감동한다. 특히 이처럼 흔하디 흔한,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숲을 보며 경탄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단순히 반성의 심리가 담겨 있기 때문일 확률이 높다. 즉 그는 아름다운 숲이 아니라 자신의 반성하는 마음에 경탄하는 셈이다. 로베르트 무질은 이런 경우를 위해 아픈 사람이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발코니에서 숲을 바라보는 장면을 상정했다. 아픈 사람은 O. 헨리의 단편 소설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처럼 이파리 하나에서도 감동을 얻는 법이니, 그는 자신이 후회스럽게 살아온 과거를 모두 반성하며 자신이 지금껏 쉽게 지나쳤던 저 숲을 보곤 감동에 빠진다. "아름다운 숲이여, 누가 너를!" 하지만 이 환자가 병에서 회복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는 금세 잊는다. 그가 반성했던 모든 것을. 그렇기에 의사는 이렇게 묻는다. "원하시는 만큼 비판하십시오. 기분이 나쁘신 것이 회복의 표시니까요."(133쪽) 이제 모든 기운을 회복한 환자가 '근심스럽게' 대답한다. "그런 것 같습니다!" 건강을 회복한 그가 왜 근심스럽게 대답하는가? 건강을 회복하자 그는 다시 진지하지 않았던 자신으로 돌아간다. 유행의 속성이 다시 그를 엄습한다. 떨칠 수 없는 그 지난한 반복의 유령이 모습을 드러낸다. 


불명확하게, 혼란스럽게, 무언가 불우하게. 그래서 근심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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