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스가 하늘을 관찰하다가 발밑의 우물에 빠지자 하녀가 그를 비웃었다는 일화는 무척 유명하다. 이 이야기는 대중들이 철학자의 허황됨과 무용을 비웃는데 이용되곤 했지만, 플라톤이 <테아이테토스>에서 탈레스의 위 일화를 언급했던 것은 철학하는 일의 쓸모없음을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플라톤은 탈레스뿐만 아니라 모든 철학자가 늘 그런 비웃음을 당할 처지에 놓여 있다고 밝히며, 철학자는 실생활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발밑의 우물에 빠질 뿐만 아니라 다른 일상적 일에도 미숙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철학자에게 그런 비웃음은 중요하지 않다는 게 플라톤이 궁극적으로 하고자 했던 말이었다. 그는 철학자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더라도 사물의 본질을 탐구해 나가려 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철학자에겐 그 본질만이 깊게 탐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이 아닌 철학자의 길을 설파했던 플라톤을 따라, 로베르트 무질은 그의 책 <생전유고>에서 글쟁이가 아닌 작가의 길을 설파하려 했다. 그는 스스로를 작가라고 여기는 수많은 글쟁이들을 바라본다. 그에게 작가란 "글쟁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일"(97쪽) 뿐이다. 철학자들이 돈을 벌 능력이 없어서 돈을 못 버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목적의식이 다르기 때문에 돈을 벌지 않는 것이라고 에둘러 얘기했던 플라톤처럼, 로베르트 무질은 작가는 글쟁이가 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작가란 존재는 글쟁이가 될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글쟁이와는 글을 쓰는 목적의식이 다르기 때문에 글쟁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로베르트 무질은 분명 글쟁이가 아니라 작가인 듯하다. 작가는 글쟁이가 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늘 작가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그들이 다 죽어버렸다고 개탄(97쪽)"할 수밖에 없으니, 살아생전에 인정받지 못했으나 지금은 20세기 현대 문학의 걸작을 쓴 작가로 인정받고 있는 로베르트 무질은 그가 냉소적으로 정의한 작가의 개념에 딱 들어맞는 진짜 작가의 인생을 산 셈이다.
오늘날과 같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살도록 결의한 사회에서는 모든 호칭에 존중을 담아야 하니, 신문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글을 써주거나 흥행을 위해 타블로이드에 남녀 행위를 자극적으로 써 내려가는 자들도 모두 작가라고 불러준다. 카메라를 손에 든 모든 촬영기사를 '감독님'으로 부르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이 올바른 사회는 펜을 든 모든 사람들을 작가라 지칭해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작가는 전 세계에 단지 수십 명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로베르트 무질에겐 이 시대는 무척 놀랍게 느껴질 테다. 출판사가 "3만 부라는 최소한의 판매량을 보장할 수 있는 작품을 완성할 수 있겠느냐"라고 묻거나 오락소설 혹은 영화에 맞는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느냐고 질문했을 때 '못한다'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던 몇 안 되는 작가들은, 탈레스를 비웃었던 트라키아의 하녀처럼, 그가 가진 대단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바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 작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악마만큼이나 있을 필요가 없었던 존재"(99쪽)다. "꺼져, 악마야!" "불쌍한 악마 녀석!" 사람들은 외친다. 하지만 철학자에겐 그런 비웃음이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꼭 그와 같은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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