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볕이 드는 곳, 그곳엔 두 발을 턱 밑에 모은 채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개가 있다. 난 이 개라고 불리는 동물을 좋아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특성, 인간에 대한ㅡ단지 자신을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만이 아닌ㅡ복종, 대개는 충직이라고 불리는 그 특성을 놀랍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난 즐거운 낮잠 속에서 어떤 행복한 꿈을 즐기고 있을 그 개를 바라보며, 어째서 이 존재가 그토록 나에게 순종적인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러자 곧 나의 시선을 눈치 챈 개는 기지개를 펴며 일어난 뒤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슬금슬금 내게 다가왔다. 난 그를 양손을 이용해 번쩍 들어올린 다음 물었다. "넌 왜 나한테 꼬리를 치니?" 하지만 내 말을 알아 들을리 없는 그 존재는 '도대체 얘가 뭐라는 거람.'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나는 이 개의 그 표정을 너무나도 좋아한다)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아주 천연덕스럽게. 나는 만족스러워하며 그를 다시 내려 놓는다.
난 이 동물의 언어를 모르지만, 적어도 이 동물이 언제 가장 행복해하는 지는 안다. 바로 무언가를 먹을 때이다. 무언가 먹을 것이 생길 것 같은 기미만 보이면 이 동물은 눈에 온갖 활기를 띤다. 귀를 뒤로 젖히고 꼬리를 있는 힘껏 흔들며 식탁에 앞발을 올려 보기도 하고 이리 저리 분주히 움직여 보기도 한다. 그때 나는 그에게서 열망과 순수성을 발견한다. 모든 열망이 담겨 있는 그 눈빛은 그 순수성으로 인해 나를 즐겁게 한다. 조금도 다른 곳으로 떨어지지 않는 그의 시선. 식사를 하다 말고, 난 그를 놀려줄 양으로 조금 큰 한 덩이의 고기를 공중으로 던졌다. 고기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본 그는 자신의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리곤 정확히 뛰어올라 낚아 그 고기를 낚아챈다. 그는 마치 승리를 하고 개선하는 장군처럼 자신감 넘치는 동작을 취하며 빛으로 따뜻해진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간다.1) 그 다음 일은 행복스레 음식을 먹는 것이다. 그때 그는 결코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마치 자신의 존재의 목적이, 그리고 모든 목적이 오로지 그 행위에 있는 것처럼.
나는 먹는다는 것 자체는 그리 고귀한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저 존재가 무언가를 먹는 행위는 경건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건 하나의 의식처럼 여겨졌다. 보통 하루에 두 번 이상은 있는 그런 반복적인 일이었는데도. 그때, 난 그를 보면서 사소한 것에 온 힘을 쏟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사소한 것에 열정적이다라는 것은 그만큼 매혹적이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흔히 사소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사소하게 생각하지 않는 방식을 나는 좋아하게 되었다. 개가 턱을 괴고 누워 졸린 눈을 떴다 감았다 할 때, 그가 귀여워해 달라는 듯이 내 주변에서 정신 없이 돌아다닐 때, 그런 정신은 잠에서 깨어났다.
어느 날 난 그 개가 잠에서 깨지 않는 것을 상상한 일이 있었다. 네 다리를 모두 한쪽으로 뻗은 채 잠을 자고 있다고 믿었던 개가, 이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여느 때처럼 눈을 감고 입은 살짝 벌린 채 누워 있던 개는 어느 순간 공[空]이 지배하는 세계로 떠나버린 것이다. 몸을 만져 보았다. 아직도 체온이 따스하게 남아있다. 나는 천천히 그의 털을 쓰다듬어 본다. 하지만 그는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난 마치 한 가족처럼 지냈던 이 동물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오스카 와일드 씨는 말했다. "삶이란 희귀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저 단순히 존재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 너는? 나는 생명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문화, 정치, 과학, 종교, 혹은 철학에 대해서 의문 한 번 품어 본 적이 없다고 믿는 그 동물에게 삶이 존재했다고 생각했다. 그 동물의 죽음을 상상할 때 내 가슴은 저려왔고, 그것은 그가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나는 A4 용지가 버려질 때 눈물을 흘리지 않기에.
그러다 문득, 난 최초의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행위들, 즉 인문학 책을 읽고, 수학을 공부하고, 방정식을 풀고, 여행을 하고, 예술을 감상하는 그 모든 행위들이 최초의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인간의 어떤 고귀한 행위가, 아니, 적어도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그를 감상하는 모든 인간을 삶 너머의 그 어떤 이상향으로 데려다 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고귀하다고 믿는 어떤 행위를 하는 것만이 오직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가을날, 어떤 이들은 굴러가는 낙옆을 보고 눈물을 흘렸지만, 그 눈물엔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의 휴식이자 보상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눈물은, 감수성은, 예술은, 그가 완벽으로 나아가기 위해 지녀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한 가지 조건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개는 울지 않는다. 다만 내가 집으로 들어서면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달려들 뿐이다. 내 주변을 맴돌며 껑충껑충 뛰어오른다. 이 동물은 환희에 차 있다.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열망과 기쁨이 그를 지배한다. 그가 어떤 순간을 위해 모든 걸 바치고 그 기쁨을 자신의 모든 몸짓을 통해 드러낼 때ㅡ나는 행복이 무언지를 어렴풋이나마 깨우친다. 비록 지성과 감성이 뛰어나지 않았고 그를 바라지도 않았으며 죽은 다음에 무언가를 남기지 않을지라도 난 이 개가 행복했다고, 이 개에게 삶이 있었다고 표현할 것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불쌍하고 무의미한 생명이 짧은 생명을 마감했다.' 그런 표현은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사소해 보이는 것조차도 순수한 열망으로 구애하기에 그의 정신은 펄럭이지 않는다. 태양과 들꽃, 돌담, 나비를 응시하는 그는 눈은 어떤 절묘함을 쫒고 있다. 어떤 매혹이 손짓을 하면 그의 꼬리는 응답을 한다. 하지만 난 그와 달리 아직 어떻게 답해야 할지를 모른다. 이제 글쓰기가 내 삶의 방편이란 고집을 벗어나야 함을 알지만 그에 어떻게 답해야 하며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난 여전히 '어디엔가로!'를 외치지만 그것은 정해지지 않은 것. 어떤 절묘한 하나의 순간을 위해, 짧은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 어디론가 길고 긴 여행을 준비해야 하건만 그곳은 어디에? 하지만 난 그 과정 또한 그 하나의 순간이 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또다시 질문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도 동물들에게 질문을 하지 않는 것처럼. 장 그르니에 씨가 말했던 것처럼, '지나온 삶이란 절묘한 어느 순간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니. 이제 내가 당면한 일이란 언젠가 다가올 그 절묘한 순간을 위하여 어떻게 작별인사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별, 이곳과의 이별은 그 순간 맞이하기 위한 시작이다. 비록 그것이 개와 내가 식사를 하는 것처럼 반복적이고 사소한 일이 된다 할지라도.
어쩌면 다음의 인용문이 이 글의 적절한 마무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꿈꾸는 듯한 말이지만, 난 여전히 그 꿈을 좋아한다.
"작별인사를 나누는 것은 이별을 부정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오늘 우리는 작별의 놀이를 하지만 우리는 내일 다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비록 자신들이 우연적이고 덧없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어떤 방식이 됐든 불멸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작별인사라는 것을 고안해 냈던 것이다.
델리아, 언젠가 우리는 다시 서로 이어지게 되리라. 어느 강가에서? 이 불확정적인 말, 우리는 한때 우리가 평원 속에 묻혀 있는 한 도시 속에서 정말로 보르헤스와 델리아였는지 자문해보게 되리라.2)"
1) 이것은 장그르니에 씨가 『섬』에서 묘사했던 고양이의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 [Back]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보르헤스 전집 4 : 칼잡이들의 이야기』(민음사, 1997), 30쪽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