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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문학동네 2007)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2. 4. 2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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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두 주인공 '나'와 '호자'는 닮은 듯 서로 다르며, 서로에 대해 혐오하면서도 속으로는 알 수 없는 충동적 호기심을 느끼는 관계로 묘사된다. 이들의 이러한 모습은 동양과 서양이 서로에게 느끼는 모습이 대입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해석되지만, 난 사실상 호자가 '나'라는 주인공에 대해 혼자서 느끼는 감정이라고 보아야 할 그런 질투와 회한의 감정을 동서양의 대결이나 융합이라는 큰 틀로 연결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호자라는 사람에게 친숙함과 동질감을 느꼈던 건 동양문명이 서양문명을 바라보며 느끼는 질투나 질시때문이 아니라, 태생적 차이로 인해 자신의 노력으로도 가질 수 없었던 서양의 과학적 지식에 대한 '개인적인' 질투심과 공명심을, 그리고 자기에 대한 탐구 끝에 찾아온 극심한 외로움과 혼란을 호자가 잘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호자는 세속적 야망에 불타지만 노예인 '나'에 대해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으며, '나'가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실제로도 그렇다는 생각에 분노를 느낀다. 그런 호자의 분노는 '나'와 '호자'의 유사성에 대한 의혹(자아탐구)으로 이어지는데, 호자의 그런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나'에 대한 존경과 야릇한 연정으로 뒤섞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애증이라는, 자신도 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답답함으로 그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호자'는 '나'와 헤어진지 오랜 시간이 지나 곧 일흔살을 앞에 두었음에도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한다. 그가 눈으로 보았던 것을 자신의 마음으로 상상하고자 하며, 그에 대한 소문을 여기저기서 알아본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렇게 찾고자 했던 것이, 그리워했던 것이 '나'인지, 회의로 가득찬 '호자'인지, 마냥 흘려보낸 젊음인지, 어느 날 의자에 누워 몇 시간이고 바라보았던 푸른 하늘과 구름인지 알지 못한다. 젊음, 야망, 사랑, 그런 것들을 떠올리면 당혹스러움을 마주하게 된다. 지식과 출세에만 몰두하던 '호자'가 자신을 내면의 고민으로 이끈 '나'를 잊지 못하듯,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든 그 사람을 결코 잊지 못한다. 해결되지 않는 감정의 혼란과 희열과 외로움은---어쩌면 이 책의 표지 그림이 나타내고자 하듯이---뒤틀린 공간 속에서 펜로즈의 무한계단 위를 움직인다. 그것이 끝없이 반복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계단을 내려와 하얀 성 아래에서 홀로 우두커니 그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 자신은 내가 되고, 나는 그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우리가 서로 옷을 바꾸어 입은 다음, 그가 수염을 깎고, 내가 그 수염을 내 턱에 붙이면 될 것이라고 했다. 이 생각은 거울 속에 비친 우리의 유사성을 더욱더 오싹하게 느끼게 만들었다."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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