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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 김훈 지음 (문학동네 2006)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2. 10. 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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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엔 자극적이라고 할만한 특별한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다. 살인도 없고 자살도 없다. 눈물 쏟는 연인들의 배신이나 기억을 판다는 환상적 설정도 없다.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주인공들과 그들이 끊임없이 신경쓰는 돈의 행방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했건 실패했건 간에, 그러니까 중견기업이나 대기업의 간부이건 택시 기사건 간에 그들은 똑같이 초로의 시기를 겪는다. 그들은 늙고, 병들고---그리고 마지막까지 돈을 걱정하며, 돈을 정리하며 생을 마무리한다. 그런 마무리엔 후회도 없고 희열도 없다. 마치 그것이 하나의 흐름이며 하나의 할 일이며 하나의 당연한 의무인양 담담하게, 자신의 퇴직과 늙어감과 죽어감을 정리한다. 돈의 정리로 결부되는 마지막 정리와 함께.

늙고 죽어가는 과정은 담담하다. 먹을 것을 토하고, 옷에 똥을 싸고, 팬티에 생리혈을 묻히고, 기침할 때마다 오줌을 흘리지만 그 모습은 마치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 그의 글에서 이 '병'이란 것은 삶과 땔 수 없는 깊은 무게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평범한 일상을 살던 그들은 병을 통해 삶을 마주하고 삶을 정리한다. 하지만 그 마주하는 삶조차도 새로울 것이 없다. 지난 삶처럼 남은 삶 또한 담담하다. 경련을 일으키며 손톱으로 벽을 긁어대는 아내를 보는 남편의 모습이나, 불치병에 걸려 죽기 전에 자신의 신변을 정리하는 남자의 모습이나, 폐경기를 맞이하는 여자의 모습이나 마치 제3자를 바라보는 것처럼 무덤덤하기 그지 없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딴 소리를 하며, 자신의 적금과 보험과 통장을 정리하고 분배하는 일이다. 아내란 단어도, 남편이란 단어도, 자식이나 회사 동료란 단어도 여기서는 모래나 아파트, 자동차 등의 단어와 하등 다를 것 없는 무게를 지닌다. 아주 일상적이며 평범하다.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이 순응할 수 밖에 없는 섭리이듯, 그들은 자신의 앞에 놓여진 삶을 마치 하나의 순응할 수밖에 없는 정해진 것인양 받아들인다. 반항도 없고, 후회도 없다.

인생의 덧없음을 노쇠하고 병든 육체, 그리고 재산을 정리하는 모습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데, 얼마 남지 않은 삶의 마지막이 세속적이었던 삶을 세속적으로 정리하는 것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삶을 더욱 덧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삶의 무의미함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일부 독자만 알 수 있을 뿐 소설 속 주인공들은 뚜렷한 자각을 하지 못한다. 무언가 이상하고 답답해서 가슴을 치며 울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그렇게 울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막연한 심정이 그들의 가슴을 짓누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답답함. 제대로 된 사랑 한번 등장하지 않는, '사랑한다'라는 말조차 몇 번 등장하지 않는 이 소설은 조건과 이해타산이 만들어낸 삶의 말미를 구름 낀 강산을 둘러보는 먼 시선으로 그려낸다. 이 광경은 우리의 편의적 선택이 만들어낸 것이가, 등 뒤에서 우리를 밀어내고 있는 삶의 물줄기가 만들어 낸 것인가. 함부로 비난할 수 없는 군상들의 모습이 그의 책 속에서 쓸쓸한 풍경으로 펼쳐지고 있다.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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