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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창비, 2008)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2. 11. 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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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씨의 소설에서 냉소와 열정의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면 김연수 씨의 소설에서는 허무에 빠진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허무를 약간 떨어진 곳에서 지켜본다고 한다면 김연수 씨의 소설은 그곳으로 파고들어 간다고 할 수 있다. 김연수 씨의 소설에서는 개인의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독백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런 독백은 주로 역사에 대한 회의, 진정한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의심, 인간성과 삶의 가치부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런 등장인물들이 그것들을 완전히 부정하며 냉소하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열망한다는 점에서 (그래서 그들은 곧잘 울음을 터뜨린다) 그 인물들을 특징지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영하 씨의 등장인물보다는 김연수 씨의 등장인물이 더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나로서는 그렇게 내면으로 침전하는 글들보다는 '거짓된 마음의 역사', '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과 같은 색다른 형태의, 색다른 배경의 글이 좋았다. 글을 쓰기 전에 역사적 배경에 대해 상당한 연구를 했다는 것이 글에서 자주 엿보였다(시대적 배경에 따른 어법 사용, 관련 고사 및 싯구의 인용 등). 하지만 근래 거의 쓰이지 않는 어휘가 자주 등장하여 일반독자의 독서 속도감을 저해시키고, 조금은 어렵게 다가오는 독백체의 내용이 일반 독서가들의 취향에는 맞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글들의 등장인물들이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동시에 그것이 서로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가정하듯, 이 작가 김연수 씨는 독자가 자신의 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글 자체에 가정하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특히) '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은 춘향전의 이야기를 신임부사와 향청 관리들의 초반 힘겨루기의 측면에서 다룬 재기 넘치는, 아주 감탄스런 패러디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소설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춘향전의 내용이 실은 비리를 저지르다 변사또에게 파직당한 한 구실아치가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강직했던 변사또와 철부지 춘향이 사이에 벌어진 일을 탐관오리와 열녀 사이의 이야기로 꾸며낸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한다. 춘향 또한 이몽룡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품은 모습으로 그리지 않고 사랑의 필연성을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도록 한다("고사를 먼저 알려준 사람이 전임 사또 자제가 아니라 변사또라면 어땠을까? (...) 먼저 읊은 사람이 책방도령이 아니라 신임 부사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 먼저 말한 사람이 이몽룡이 아니라 변학도였다면 어찌됐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누구를 위해 수절했을까? 그렇다면 도대체 수절이란 무엇인가? 그런 그녀에게 영원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책163~164쪽). 이런 묘사는 역사에 대한 회의, 사랑의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내주고 있다. 이런 점은 대중적 재미를 주지 못할지는 모르나 문학적인 측면에서 주는 재미와 감동은 그보다 더하다 할 수 있으니 느끼기에 따라서는 예술이 주는 감흥까지 그에서 얻어갈 수 있다.

충분히 소장할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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