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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지음, 장희창 역 (민음사)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2. 11. 2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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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기에 내용을 길게 적었다가 모두 지워버렸다. 이상하게 쓰면 쓸수록 기이한 모순에 빠져드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니체의 다른 개념은 큰 문제가 안되었다. 오히려 수긍이 가고 이해가 되었으며,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가치관을 반대하는 현대의 흐름에 힘을 주고 있었다. 내가 가장 문제시했던 것은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이었다.

니체는 사람들 내부에는 무언가를 욕망하는 힘에의 의지가 있다고 보았는데, 그 의지가 자신을 조형하고 제어하고 극복하여 자신을 더 나은 인간, 자신을 주체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힘을 준다고 보았다. 그런데 나는 그런 의지가 없는 사람을 생각했다. 내가 볼 때 그런 힘에의 의지가 있는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의지가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주체가 될 뿐만 아니라 세상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닌 사람이 되곤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의지가 없는 사람을 개선의 대상으로 봐야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 위버멘시(초인)를 따르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인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볼 수 없다면 가치를 스스로 창조하라는 니체의 주장 자체가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한편으로 니체는 사람이란 궁극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선악을 넘어 어린아이처럼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린 아이에게 힘에의 의지가 있다고 봐야 하는가? 분명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린아이는 선과 악을 떠나 즐기고, 영원회귀와 관련 없이 자기 주변의 것에 행복해한다. 그렇다면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어떻게 본 것일까? 어떻게 보면 힘에의 의지를 없어도 되는 것으로 본 게 아닐까?

니체는 이 책을 문학의 형식을 빌려 내용을 은유와 잠언으로 채웠다. 그래서 독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 고 난 생각한다. 이 책은 실제로---성경이 그러했듯---사람들의 입맛에 따라 해석되어 마음대로 쓰였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치맛바람 강한 극성적인 엄마는 이 책을 자신의 자녀를 혹독하게 훈육하는 근거로 삼을 테고, 허무주의자는 세상의 덧없음을 강조하는 데 쓸 것이며, 나르시시스트는 지적만족의 도구로 사용할 것이고, 허영에 빠진 이는 몇 가지 잠언들을 이용해 자신의 겉멋을 채울 것이며, 어떤 파시스트는 우생학의 바이블로 삼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사실 니체는 이 책을 대중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 그가 예언했던대로,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여 받아드릴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버멘시는 그의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느 순간 불가사이한 이유로 갑자기 나타날 것이며, 그의 책을 찾을 것이고, 그리고 아 여기에 내 얘기가 있다, 하며 즐거워할 것이다. 어쩌면 그도 그 한계를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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