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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동형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0. 11. 2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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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문장, 올바른 표현법을 알려주는 책들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런 책들은 거의 항상 피동형 문장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여겨진다", "되어지고 있다"와 같은 표현은 영어의 수동태에 영향을 받은 잘못된 표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난 일부러 "공을 들여" 그렇게 쓸 때가 있다.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다. 능동형 문장이든 피동형 문장이든 그것은 그 자체로 자신만의 언어적 질감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하는 건 의미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둘 중 한쪽만이 정답이라고 배운다. 비슷한 예로, 우리는 한 문단에서 같은 단어를 반복하여 쓰는 것 역시 좋지 않은 문장이라고 배운다. 이에 대해 밀란 쿤데라는 다음과 같은 뜻을 전한 바 있다.


"나보코프는 러시아어판 '안나 카레니나'의 시작부분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여섯 줄 속에 여덟 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작가가 일부러 공을 들여 그렇게 쓴 것임을 역설한다. 그러나  프랑스어 번역판에는 '집'이라는 단어는 한 번밖에 나오지 않고 체코어 번역판에도 두 번을 넘지 않는다. 같은 책에서 톨스토이가 'skazal(말했다)'이라고 쓴 곳마다 번역자들은 '말했다', '되풀이했다', '소리쳤다', '결론지었다' 등으로 바꾸어 썼다. 번역자들은 동의어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

권위는 바로 이럴 때 유용하다. 누가 감히 톨스토이와 밀란 쿤데라의 글쓰기에 함부로 반박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런 구분에 미련을 갖는다. 아마도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오로지 그런 옳고 그름의 명확함 속에서만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에, 혹은 아무 법칙이라도 일단 만들어 놓음으로써 이전의 권위자가 지니고 있던 명성을 이어받게 되길 원하기 때문에. 놀라운 점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문장의 피동성을 넘어 스스로의 사고와 행동에도 필연적으로 피동성을 수반해간다는 점이다.


*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188쪽. 권오룡 옮김. (민음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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