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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1. 9. 27.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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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블로그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내가 나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상대방은 나의 아름답지 못한 부분을 찾기 시작하고, 내가 나의 뛰어남을 이야기할 때 상대방은 나의 부족한 부분을 찾기 시작한다." 앞의 문장이 겸손의 필요성에 대해 '일부나마' 올바르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엔 틀림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글쓴이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 문장은 내게 감화를 일으키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 문장이 겸손의 필요성을 상대의 반응으로부터 유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온갖 종류의 선이라는 것은 상대의 반응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옳아야 했다. 즉, 땅에 떨어져 있는 주인 모를 지갑을 자기가 슬쩍하지 않는 것은, 그 주변에 나의 부족한 부분을 찾기 시작할 상대방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그 자체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이 나의 아름답지 못한 부분을 찾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아름다움)을 말했을 때 양심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나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을 때 양심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 아름다움을 이야기해도 나쁘지 않다. 예를 들어 자기가 솔선수범하여 길가의 쓰레기를 주어오던 사실을 자신의 직장동료에게 말한다면, 그것을 말하는 그 스스로도 이것이 자랑이나 자만이 아닐까 하는 염려스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자신의 자식들에게 말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의미가 될 수 있다. 그것은 교육의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에까지 겸손을 취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는 이유가 상대방이 (즉 자신의 자식이) 나의 부족한 부분을 찾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첫째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평가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둘째로 위 인용문이 아포리즘처럼 쓰였기 때문에 그 문장의 올바름뿐만 아니라 그 문장을 처음 보았을 때 느껴지는 감정 또한 중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며, 셋째로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하지 않고 문장상의 논리에 연연하다 보면 말꼬리잡듯이 글의 논점이 빗나가버리는 데다가(자신의 진짜 의도를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글로 완벽히 표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넷째로 '공포심 때문에 행한 선은 올바른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정답이 없는 철학적 논쟁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첫 문단에 저처럼 장황한 글을 적어내려 간 것은 저 인용문을 보자마자 느낀 왠지 모를 거부감 때문이었다. 사회의 많은 것들이 공포를 기반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실패에 대한 두려움, 고통에 대한 두려움, 주변의 평가에 대한 두려움) 겸손이라는 도덕성마저 상대방의 평가와 맞물려 표현되어 있자 거부감이 생긴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 공포심에 근거한 도덕적 행동은 여전히 논쟁거리이다. 하지만 누가 (그게 신이든 인간이든) 날 때릴지 모르기 때문에 겸손하게 행동한다는 것은---내가 실제로는 공포심 때문에 겸손한 척 할지라도---아직까지는 받아들이기에 힘든 사실인 것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위 인용문은---마치 악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선은 진짜 선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처럼---스스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스스로가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꼴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그런데도 저 문장이 공포심에 관한 어떤 글로 내게 곧바로 느껴졌다는 것은 그만큼 내 시각이 편협한 어떤 곳으로 쏠려 있다는 의미였다. 서로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진보와 보수의 양 진영처럼 난 무언가에 달려들기를 원하고 있었다. 결국 저 문장은 내가 겸손하지 못한 데다가 무언가를 판단하기 위해 항상 준비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알려주었으니, 그야말로 겸손에 관한 훌륭한 문장이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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