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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번호털이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2. 7. 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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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고털이 파인만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예전 생각이 났다. 내가 비밀번호를 캐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시절 집에 있던 컴퓨터 때문이었다. 내가 컴퓨터를 과도하게 하는 것을 걱정하셨던 어머니는 컴퓨터 윈도에 비밀번호를 걸어두셨는데, 그 때문에 난 집에 혼자 있을 때도 컴퓨터를 할 수 없었다. 컴퓨터를 할 수 있는 시간이란 영어 단어나 한자를 외운 뒤 시험에 통과했을 때 뿐이었다. 난 그런 제한을 견디기 힘들었고 그래서 비밀번호를 알아내기로 결심했다.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컴퓨터 윈도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기 전 어머니가 부엌쪽을 바라본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이 부엌에서 무언가를 연상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숟가락, 밥통, 의자, 식탁 따위의 단어를 대입해 봄으로 써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비밀번호를 알아낼 수 있었다.

내가 비밀번호를 알아냈다는 걸 눈치 챈 어머니는 비밀번호를 바꾸었다. 다음 번 비밀번호는 꽤 알아내기 어려웠다. 일반적인 단어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엔 심리적인 방법이 아니라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당시 키보드엔 먼지 따위가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한 반투명 덮개가 덮여있었는데, 난 그 덮개 안쪽에 양면 테이프를 붙여놓았다. 약간의 예외적인 상황-오타-가 발생하긴 했지만 자음과 모음의 조합을 이용해 조합 가능한 비밀번호 개수를 줄이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 동원된 방법은 윈도가 아니라 컴퓨터 부팅암호(CMOS)를 걸어두는 일이었다. 이 비밀번호는 어떤 방법을 써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난 또 방법을 알아냈는데, 컴퓨터를 뜯어낸 뒤 메인보드의 은색 시계약을 빼냈다가 잠시 뒤 다시 끼우면 비밀번호가 초기화된다는 걸 알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딱 한번 밖에 써먹질 못했는데, CMOS 패스워드를 초기화는 했어도 알아내지는 못했기 때문에 비밀번호가 바뀐 걸 어머니가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급기야 어머니는 키보드를 컴퓨터에서 때어내어 서랍에 넣은 뒤 자물쇠로 잠가버리는 조치를 취해버렸다. 그때 나는 서점으로 가서 자물쇠의 원리에 대해 읽어보곤 했는데, 그 원리를 깊이 파보기도 전에 맥이 풀리고 말았다. 끝이 뾰족한 도구를 자물쇠 안에 집어넣어 몇 번 흔들자 자물쇠가 탁 하고 풀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0부터 9까지의 숫자 중에서 올바른 숫자를 누르면 풀리게 되어있는 자물쇠도 있었는데, 재미있게도 어떤 번호를 누르면 그 번호와 연관된 다른 번호도 아주 미세하기 움직여서 결국 자세히 관찰하면 비밀번호를 알아낼 수 있었다. 난 그때부터 자물쇠라는 것에 큰 신용을 갖지 않게 되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왔을 당시 대학교는 자전거 도둑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자전거 열쇠로 대부분 다이얼식 비밀번호를 쓰고 있었는데 그 숫자 배열이 3줄에 불과했던 것이다. 3줄이면 번호가 0부터 9라고 가정했을 때 최대 1,000번의 조합이면 풀리는 비밀번호였다. 말이 1,000번이지 대개 700번 안에 풀리기 마련이고, 700번의 조합을 맞추는 데는 10분 정도면 충분했다. 자물쇠 줄의 굵기도 문제였는데, 너무 얇아서 줄톱으로 5분만 긁어도 툭 잘려버릴 정도였다. 그때 나는 사람들이 자물쇠나 비밀번호에 큰 관심이 없으며, 그러한 도구들이 단순히 심리적 안정을 주는 요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가 벌써 20년 전이다. 하지만 그런 단순성은 여전히 미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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