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산책을 하러 집을 나섰다가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이야기가 다소 차분하고 느리게 진행된다. 처음 읽을 때는 집중이 잘 되지 않고 글도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아마 딴 곳에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 읽고 난 다음에 다시 처음부터 읽자 그제서야 글의 흐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작가는 산책을 하며 그제서야 자기만의 세상에서 벗어난다. 다른 사람과 처음으로 말도 하고, 쌓여있던 편지들에게도 눈길을 던지며, 그동안 보지 않았던 주변의 풍경들 하나하나에 마음의 평안을 느낀다. 그때에도 그 풍경들은---작가라는 그의 직업 때문에---작품의 소재들이라는 꼬리표를 떼지는 못하지만. 밤이 되어 집에 되돌아온 그는 침대에 누워 그가 산책을 했던 오후의 풍경들을 회상한다.
독자가 아니라 스스스로를 위해서 이런 글이 써보고 싶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자신(작가)을 위한 글. 책의 첫 페이지에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시인 타소의 삶을 다룬 괴테의 희곡, "토르콰토 타소"의 한 부분이 인용되어 있는데("모두가 있는 곳에서 난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괜한 인용은 아닐 것이다. 즉,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작가로서 가지게 되는 삶의 특이성(모두가 있는 것에서 아무것도 아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책의 화자)가 글쓰기를 마친 후 산책을 나서며 시작하는 이 글은, 작가에게 산책이란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을 나타내보려고 하고 있다. 작가에게는 산책이 단순한 기분전환이 아니라 어떤 의식적인 활동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독자가 작가라는 사람이 가질 수 있을 감정에 자신을 이입하지 않는다면 이 책이 지루하게 느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상적인 부분이 많고, 괴이쩍게 그려진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묘사된 작가는 확실히 평범하지는 않다. 그는 불안과 강박에 떨고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은 그가 구도자의 길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얻어진 병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의 모습이 때로는 성인이나 예언자의 모습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나는 그런 모습이 작가라는 사람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모습으로서(천재들과 천식의 상관관계처럼) 상상되기를 희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보이는 '그'라는 작가가 바로 페터 한트케 그 자신을 닮아 있을 거라는 상상을 쉽게 거부하기는 어려워보인다. 아마, 그였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란 무엇인가? 난 여전히 "작가로서의 나"와 "나로서의 작가"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어떻게 다른 건지 잘 와닿지가 않는다(더 곰곰히 생각을 해봐야 할 것이다). 비록 이 책의 주제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난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이 책에서 말하는 작가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사람일 거라고 말이다---온종일 혼자 집에 있었던 작가는 저녁이 되서야 산책을 나선다. 그리고 처음으로 말도 하고 사람들도 만난다. 그 산책에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느낀 뒤 집에 돌아온 작가는 침대에 누운 채 산책 중에 있었던 일을 다시 생각해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때 생각나는 것은 "카솀메의 커튼 틈새로 흔들리는 가지들과 마우스피스를 입에 문 채 복서처럼 이빨을 드러내며 그 앞을 맴도는 개"뿐이다.
"예로부터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밖에 있을 때 바로 제자리에 있다고 느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16쪽
"사실 그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매순간 자신의 글쓰기 목적을 추구하며 살아왔다. 그렇지만 오늘날까지도 그는 목적에 이르는 확실한 방법을 알지 못했고, 그에게는 모든 것이 어린 시절, 그 후의 학창 시절, 보다 나중의 풋내기 작가 시절처럼 일시적으로 머물러 있었다." 27~28쪽
"작가는 그의 인사에 대꾸하면서 자신이 이날 처음으로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31쪽
"작가는 교차로에서 이례적으로 오랫동안 서 있었다. 자신의 활동을 통해 어떠한 생활 질서도 미리 그려 놓지 않는 그는 보잘것없는 나날의 움직임에도 하나의 이념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러한 이념은 두 가지, 즉 변두리와 중심을 연결시키려는 생각, 중심을 통과해서 변두리로 걸어가려는 생각과 함께 찾아왔다. 바로 그래서 그는 책상을 떠나 사람들 근처로 가는 것이 아닐까?" 29쪽
"그의 목적지는 음식점이었다.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말라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앉아 약간의 서비스를 받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혼자 방 안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당당하게 그런 요구를 하려는 것 같았다." 36쪽
"작가는 광장에서 광장으로 전보다 천천히 걸어 다니다가 이윽고 멈춰 섰다. 걸을수록 일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서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작품>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는 재료란 거의 중요하지 않고 구조가 무척 중요한 것, 즉 특별한 속도 조절용 바퀴 없이 정지 상태에서 움직이는 어떤 것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요소들이 자유로운 상태로 열려 있는 것, 누구나 접근 가능할 뿐 아니라 사용한다 해서 낡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39~40쪽
"주의를 늦추지 않는 것이 전사와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자기 탁자에 앉아서 온갖 싸움에 거리를 두었다. 그렇다. 그는 개입하면서가 아니라 보란 듯이 침묵하면서 싸움을 완화시켰다." 99쪽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방에서 타자를 치며 활짝 열린 창밖으로 자신이 내는 소음을 세상에 내보내고 있었다." 115쪽
"그러는 중에 아나운서는, 그가 방금 읽은 내용이 이유가 될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내내 관심을 기울여 왔고, 이제 막 그의 내부에서 터져 나오려고 한 무언가에 대한 격렬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눈물이 날 것 같은 상태였찌만, 그는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집게로 자신을 집으려는 사람처럼 말을 참으며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그는 고함을 지르며 뛰쳐나가려 했고, 일기 예보로 구원을 얻으려고 했으며, <안녕히 주무세요>라는 인사말만 겨우 건넸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즉각 마이크에서 떼어놓았다. 그는 해고된 것일까? 애인이 그에게서 떠나간 것일까? 징 소리가 울리기 직전에 누군가가 죽었다고 사람들이 그에게 알린 것일까?" 117쪽
"그는 왜 혼자 있을 때만 그토록 순수하게 남의 일에 관심을 갖는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떠나고 나서야, 그들이 멀리 가면 갈수록 그들을 깊이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117쪽
"무엇 때문에 사람은 느릿느릿한 신을 생각해 내지 않았는가? 자신의 생각에 감격한 그는 계단을 훌쩍 뛰어 올라갔고, 그의 발밑에서 집 전체가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119쪽
"나는 소설의 형식으로 시작했다! 계속한다. 그대로 놓아둔다. 반대하지 않는다. 서술한다. 전해 준다. 소재들의 가장 피상적인 부분을 계속 가공하고, 그 숨결을 느끼며, 그것을 다듬는 자가 되고자 한다." 121쪽
"그는 또한 이런 맹세를 하기도 했다. 일에 실패하지 말자고. 다시는 언어를 잃어버리지 말자고. 그러면 언덕 아래 양로원의 조그마한 관현악단은 찌르릉거리는 점심 연주 대신에 그럴듯한 종소리를 울릴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그는 지나간 오후를 회상했고, 그때 일어난 일을 기억에 되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카솀메의 커튼 틈새로 흔들리는 가지들과 마우스피스를 입에 문 채 복서처럼 이빨을 드러내며 그 앞을 맴도는 개만이 나타날 뿐이었다." 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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