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수거를 하는 날이 되면 새로운 쓰임으로 태어나길 기다리며 집안 한 구석에 쌓여있던, 쓰레기라고 불러선 안 될 것 같은 물건들을 가지고 밖으로 나간다. 그날은 종이를 분리하여 놓아두는 곳에 있던 책 뭉치가 눈에 띄였다. 그리고 제일 위쪽에 놓여있던 책의 제목을 보고는 그 책들이 흔히 버려지곤 하는 잡지류의 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마르케스, 하루키, 헤세의 이름이 보였다. 난 물건들을 분리하다 말고 그 책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책을 둘러싸고 있던 끈을 풀렀다. 끈이 풀리자 책들은 힘없이 분리수거장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난 책의 이름과 상태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책들을 다시 쌓아 올렸다. 분리수거장이라고는 하나, 일반인들에게는 생활폐기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 몸을 쭈그린 채 앉아 있는 모습이 범상치 않았을 것이다. 문득 관리인이 다가와 뭘 하고 있느냐 물었다. 괜찮은 책들이 있어서요. 난 나지막이 대답했다. 이상하게 목소리가 크게 나오지 않았다. 괴테, 헤세, 하루키 같은 작가들의 너무나도 멀쩡한 소설책들이 분리수거장에 버려져 있는 현실이, 어쩌면 그걸 다시 살리겠다며 주어들고 있는 내 모습이, 내 목소리를 앗아간 것만 같았다. 내 말이 그에게 제대로 들리지 않은 것 같았지만 관리인은 그냥 지나쳐 걸어갔다.
책을 가지고 집으로 올라왔다. 그리곤 커버를 벗겨낸 후 겉면의 먼지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난 이 책의 원래 주인에 대해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주인은 Jamie란 이름의 여자일 것이고, 책을 한꺼번에 사는 경향이 있었으며, 책을 무척 깨끗이 보거나 아니면 장서 형태로 보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 외에도 몇 가지. 책 밑면에 찍혀 있는 구입 날짜에서, 책을 살 때마다 찍어 두었던 장서인에서, 먼지가 유난히 많이 묻어 있는 방향에서, 주로 구입한 책의 종류에서 그런 것들을 추측해볼 수 있었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책 하드 커버 바로 안쪽에 붙어 있던 일본 지하철 노선도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그 노선도는 일본 도쿄의 것이었고 한글로 작성되어 있었다. 이 책의 주인은 일본 작가를 좋아하는 것 같았고, 일본이라는 나라에 관심이 제법 있는 것 같았으며 또 이 책을 들고 직접 일본에 갔던 것 같았다. 그녀는 도쿄의 어느 지하철 의자에 앉은 채 이 책을 읽다가, 책 안쪽에 끼워넣은 지하철 노선도를 확인해 보았으리라.
그때 문득 '나라면 일본어로 되어 있는 노선도를 보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이 '나라면'이라는 한 단어가 나를 새로운 생각으로 인도했다. 그건 '나라면 일본어로 되어 있는 걸 보았을 텐데'라는 이 말을 어떤 이는 '너는 일본어로 되어 있는 걸 보았어야 했어'로 바꾸어 들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단순히 나에게 한정하여 말한 가정법이 '너는 그러지 못해' 혹은 '너도 나처럼 해야해'라는 비교와 강제의 의미를 띤 채 상대에게 들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제이미라는 사람이 나의 그 생각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어둠과 사랑과 혁명과 아빠, 그리고 수레바퀴가 제목으로 들어간 이 책들을 읽고 버린 그 사람은.
가네시로 가즈키의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책을 펴자 작은 종이 한 장이 내게 굴러 떨어졌다. 편의점 영수증이었고, 거기엔 2,500원 짜리 담배를 샀다는 증거가 박혀있었다. 난 그 영수증을 쓰레기통에 버리려다 말고 책 한편에 꽂아 두었다. 그리곤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녀는 아마도 담배를 피며 이 책을 읽었을 것이다'라고. 그리곤 가만히, 코를 책 사이에 가져다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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