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자의 옷에 눈길이 간다. 그 옷에는 큼지막하게 "PLEASE SAY NO"라고 쓰여 있다. 일부 사람들은 이런 옷 자체를 혹은 이런 옷을 입고 있는 여자를 비웃는다. 저 영어 문장을 해석해 보았을 때 그 뜻이 옷, 여자, 또는 그 주변의 상황 등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어로 된 그 문장이 해석하기 매우 쉽거나 조어법이 틀렸거나 뜻이 상투적이라면, 그건 실패한 디자인(싸구려 감수성)으로 취급받고, 그 옷을 입고 있는 사람 또한 비슷한 대우를 받게 되는 일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일은 우리가 그 언어를 우리말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벌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하는 순간 디자인으로써의 문자는 그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한글 문장이 인쇄되어 있는 옷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그 한글 문장이 담고 있는 내용의 의미가 너무 강조되어, 스타일 관점에서 해당 문자를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영어라는 이국의 단어로 쓰여진 문장은 그 내용이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기 때문에 디자인의 요소로써 활용이 되곤 하지만, 한국인들의 영어 이해력이 전반적으로 높아지면서 영어가 인쇄된 옷 역시 한글이 인쇄된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게 되어버렸다.
이런 현재의 상황에서, 영어든 한글이든 옷에 인쇄된 그 문자들을 스타일로써 바라봐야지, 그러지 않고 내용을 해석한 뒤 비웃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보통의 사람들이 문자를 바라보는 눈은 일차적으로, 그리고 거의 영구적으로 '내용'을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이미 내용이 가치의 전반을 차지하고 있는 임의의 곳(그러지 않은 곳이 얼마나 되는가?)에서 순수하게 예술성 그 자체를 추구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에 속할 수밖에 없다.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