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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혹한 이들을 위한 안내서. E.F.슈마허 지음, 송대원 옮김 (따님 2007)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4. 12. 27.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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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근대 철학, 정확히 이야기하면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자에 대한 비판적인 주장을 하며 책을 시작한다. 철학이 수학과 물리학과 같은 확실한 것만을 토대로 사유하기 시작하면서, 그 이전 세대(중세)가 추구하던 관심의 영역이 사라져버렸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관심의 영역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고 또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꽤 모호하다. "전통적 지혜는 항상 세계를 3차원의 구조로 나타내 보였는데, 이런 세계에서는 '높은' 사물 및 존재단계와 '낮은' 사물 및 존재단계를 언제 어디서나 구별하는 것이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필요했다. 이에 반해 새로운 사고는 수직적 차원을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22쪽)

저자의 말에 따르면 '수직적 차원'이라는 것은 근대 철학에 의해 그저 없어져버려야 하는 가치가 아니라는 것인데, 이 '수직적 차원'이나 '3차원의 구조'라는 게 정확히 무얼 뜻하는 건지 저자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저자가 따로 기술하지는 않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수직적 차원'이라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의 존재를 추론할 때 제시한 다섯 가지 증명 중 네 번째를 암시하는 것(저자는 자신의 책 여기저기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인용하고 있다)이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사물을 비교할 때 여러가지 방식으로 비교할 수 있다. 어떤 것이 더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더 가치가 있다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물에 대한 그런 비유가 가능한 이유가 그 사물들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극치인 어떤 것을 닮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가장 참되고, 가장 고귀하고, 가장 선한 사물이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더 낮거나 더 높은 형태의 존재를 가지는 사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논리를 적용할 수 있으며, 그런 논리를 펴다보면 돌과 이성적인 피조물을 비교할 때처럼 <최상의 존재인 그 어떤 것>이 존재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신이라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장하였다.

이 책의 저자가 쓴 "높은 사물 및 존재단계와 낮은 사물 및 존재단계"라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증과 아주 유사한데, 따라서 그것은 아퀴나스의 주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즉 저자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한, 저 높고 낮음의 비교에서 추론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존재에 대한 가정을 폐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을 근대 철학이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유의 지도들은 (...) 사람들의 두려운 삶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게 되었다"(23쪽)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부분이 무척 이상하다. 근대철학이 '모든 존재들의 완전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최상의 존재'에 대한 가정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해서 인간의 존재가 가치없어졌다고 할 수 없으며, 최상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높고 낮음에 대한 생각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최상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은 우리의 감각으론 인지할 수 없는 부분까지 사고를 확장하지 말자는 새로운 관점에 출발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더 좋은 것, 더 나쁜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논리가 극단으로 나아가는 걸 염려했을 뿐이다. 게다가 모든 근대 철학자들이 오로지 감각적 경험이나 수학을 토대로 철학을 펼친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근대 철학자인 칸트 역시 신의 존재를 여러 번 증명하였고 강조하였음에도 저자는 칸트가 뉴턴의 물리학적 입장을 옹호했다고만 할 뿐, 칸트가 신의 존재를 입증한 부분에 대해선 일언반구 하지 않는다.

 

또한 저자는 "전통적 지혜는 인간의 정신이 비록 허약하지만 그 끝은 열려 있다고" 생각한 반면 "유럽의 새로운 사고는 인간의 정신이 분명하게 정해질 수 있는 좁은 범위에만 미치며 오로지 그 안에서만 거의 무한한 힘을 갖는다"(22쪽)고 말한다. 그런데 지은이의 주장처럼 전통적 지혜와 근대의 사고를 이분법으로 나눌 수가 있을까? 상당히 잘못된 주장이다. 전통적 지혜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해주고 있지 않지만(아마도 인간의 상위에 있는 '신'을 인정했을 때만이 얻을 수 있는 겸허한 태도와 그 태도로 삶을 관조할 때 얻을 수 있는 지혜, 정도를 뜻하는 것이겠지만) 근대 철학이 '좁은 범위'에만 자신의 사고를 한정지은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보는 건 상당한 억지다. 자신들의 이성과 경험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을 확신에 차서 주장하는 것이야 말로 (당시 철학자들에겐) 근대 이전으로의 회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고 그런 사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또 저자는 근대 철학자들이 실패한 근거로 '공리주의'를 들며 다음과 같이 썼다: "공리주의는 결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쓸모있는 답을 내놓지 못한다"(25쪽) 이 주장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는 하나, 그것이 근대철학 자체가 인간을 구제하는 데 실패했다고 규정할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공리주의는 이미 근대철학자들 사이에서도 같은 이유로 비판 받았으며, 공리주의가 근대철학을 대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수직적 차원의 상실은 더 이상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공리주의적인 대답 외에는 해줄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했다."(24쪽) 책의 초반부터 이런 류의 단정적인 주장들이 계속되고 있으니 이 책에 대해 큰 실망을 하게 되었고, 계속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책을 붙잡았지만 실망은 계속되었다. 그는 이후 자신 나름의 사상 체계를 펼쳐 나가는데, 갑작스럽게 세계를 네 개의 '계'로 나눈다. '광물, 식물, 동물, 인간'이 그것이다. 왜 하필 이렇게 구분지었는지(명백히 존재하는 세균, 원생생물, 균류는 어디에 속하는가? 인간은 동물에 속하지 않는가?), 저 네 단계에 어째서 수직적 관계가 형성되는지('생명'의 존재 여부가 어째서 높은 가치와 낮은 가치를 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동물이 식물보다 높은 단계라고 볼 수 있는 객관적 근거는 무엇인가? 생명력이나 번식력, 육체적 능력으로 따지면 인간보다 우월한 많은 존재들을 우리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는가? 높고 낮음의 기준이 정확히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은 상당히 추상적이다.

그는 인간을 마지막 단계에 놓은 이유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물에서 인간 단계로 옮겨가는 데 또 새로운 힘이 더해진다는 것을 그 누가 진정으로 부인할 수 있겠는가? 그 힘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근대에 논란거리가 되었지만, 인간은 가장 고도로 발달한 동물에게 가능한 범위를 완전히 넘어선 수많은 것들을 할 수 있고 또 하고 있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고, 부인된 적도 없다."(32쪽) 그런 방식이라면 그가 왜 인간 위쪽에 '천사'나 '아주 발달한 문명의 외계인'을 올려 놓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는 얼마든지 높고 낮은 단계를 생각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또 그는 광물과 식물의 차이로 아직 과학이 정의할 수 없는 '생명'을 제시하는데(그 자신도 과학은 아직 생명을 정의할 수 없다고 쓰고 있다), 기왕 그렇게 '정의할 수 없는 상상의 어떤 것'(생명)을 단계의 차이로 제시할 거라면, 인간 위쪽에 천사를 놓은 뒤 '영적인 힘'이라는 가상의 것을 그 차이로 둬도 좋지 않겠는가?

 

그가 궁극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주장이 어떤 것인지는 알겠다. 과학의 환원주의를 경계하고, 너무 이성과 논리에 집착하여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 고유의 존엄성을 잃지 말고, 신을 생각하며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지혜를 찾고... 그러나 그런 주장을 펴기 위해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아주 많은 철학자들 중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주장만을 뽑아서 쓴다던지, 몇몇 극단적인 과학자들의 주장을 인용하여 그걸 전체의 인식처럼 말한다면, 그는 자신의 주장을 전부 말하기도 전에 거부당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철학, 과학, 신학을 이용하였으며 그를 기반으로 자신만의 사상을 만들어냈으나 그 논증이 빈약하여 전반적으로 신비주의의 느낌이 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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