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진>이라는 건 쉽게 말해 값비싼 청바지다. 난 스스로를 패션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걸 들었다. "청바지는 자유와 저항을 상징한다." 그리고 동시에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걸 들었다. "프리미엄 진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40대 이상의 자유분방한 분들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난 사람들이 옷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에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은 값비싼 것으로 알려진 상표가 붙은 가방이나 옷을 입고 다닌다. 그 상품의 디자인과 기능이 값비싼 가격과 얼마나 잘 부합하는지는 알 수 없으며 알 필요도 없다. 그들이 돈을 주고 산 것은 어쨌거나 (진짜 그런 값어치를 하든 안하든 간에) 값을 매겨 살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돈을 주고 구입한 것은 <물질>이고, 자본주의 사회의 연결 고리인 물질(만능)주의 속에서는 그 누구도 섣불리 그들의 행위를 비난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상품이 청바지가 되면 상황이 묘해진다. 일부 패션 전문가들이 청바지에 <어떤 고결한 정신>이 담겨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상품을 구입하여 입는 사람은 그 정신마저 갖추게 된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청바지에서 그런 정신이 파생되었든 아니면 그 반대이든 간에, 청바지에 어떤 특별하고 의미있는 가치가 담겨 있다는 믿음은 일반적인 것 같다. 그런 믿음이 생긴 것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분명 '자본이 과하게 투자된 물질'에서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우리는 가난한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바람 빠진 축구공에 어떤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말하긴 해도, 최고급 천연 가죽으로 만든 전시용 축구공에 그런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는 말하진 않는다.
그렇다면---패션 전문가들이 말한 대로 청바지가 자유와 저항, 젊은 같은 것을 상징한다면---청바지의 그런 가치 역시 물질의 고급화 전략에서 싹트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항적인 젊은이들이 즐겨 입어서였건 가난한 노동자들이 주로 입어서였건 서부 카우보이들이 즐겨 입어서였건 간에, 그 출발은 분명 '고급'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프리미엄 진>이라는 것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오는 것까지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 자본이 고급화 전략을 쓰는 건 쉽게 볼 수 있는 일이다. 놀라운 일은 이 값비싼 청바지에게도 그런 정신이 여전히 담겨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였다. 그 패션 전문가는 이 프리미엄 진을 통해 남들과 다른 특별한 정신적 가치와 신분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다고 말했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한 이 말은 실은 다음과 같다. 고행자들이나 입던 낡아빠진 싸구려 적삼이 <앎, 수행, 행복>과 같은 의미를 띠면서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자, 눈치 빠른 한 대기업이 프리미엄 적삼을 만들어 고가에 팔면서 고행자들의 <앎, 수행, 행복>을 느껴 보라고 권하는 것이다. 물론, 일반 적삼과는 다른 프리미엄 적삼으로 당신의 경제적 풍요로움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고 유혹하면서.
이런 현상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예수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했으나, 오래전부터 몇몇 사람들은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상을 황금으로 만들어 목에 걸고 다녔다. 그러면서 예수의 신성함이 자신에게 깃들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을 본 사람들은 예수가 아닌 황금의 황홀한 번쩍거림에서 그의 신성함을 찾았다. 오늘날의 프리미엄 진이라고 하는 것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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