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내용이 일견 어려워보인다. 초반부터 어려운 소설책과 철학 용어들을 인용하고 있어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조금 멀리 떨어져서, 이 책이 현대의 일상성에 대해 논하는 책이라는 것에 집중해 보면, 이 책에 다가서는 게 다소 쉬워진다.
첫째 장은 소설 속에서 표현된 일상성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그 소설은 제임스 조이스가 쓴 '율리시스'이다. 저자는 첫째 장의 상당 부분을 '율리시스'라는 소설을 비평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그리 친절하지 않다. 즉, 그는 '율리시스'에 대한 상당한 이해력을 가진 독자들을 대상으로 글을 썼다. 따라서 '율리시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독자가 이 부분을 읽으면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결국 소설 속에 등장 인물들이 보여주는 일상성이란 것을 생각하면 전체 맥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음 단락은 첫째 장의 핵심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작가는 일상을 밝혀내고, 그 가면을 벗기고, 그것을 폭로한다. 그리고 일상을 점점 더 참을 수 없는 것으로, 거의 흥미가 없는 것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 (문학적) 글쓰기에 의해 그것을 아주 흥미롭게 만든다. 이 분석은 그러니까 말해진 사물과 말하는 방법에서의 변화를 조명하고 있다. (...) 이 '세계'는 일상의 세계와 비유의 세계로 두 겹이 갈라져 있다." (57~58쪽)
두 번째 장은 저자가 왜 이런 글을 쓰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부분이 특히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철학자와 그들의 철학 이론들이 불쑥불쑥 등장하여 일반 독자들을 당황시킨다. 마치 경고(?)라도 하듯 두 번째 장의 시작부터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즉 철학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59쪽) 그는 왜 철학에서 출발해야 하는지 서술한다. "일상성의 개념은 철학에서부터 나왔고, 또 철학이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이 개념은 철학에 의한, 그리고 철학에 대립된 비철학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 일상성의 개념은 일상에서 오지 않고, 일상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철학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간주된 일상의 변형을 표현하는 것이다. (...) 이 개념은 비철학적인 것을 숙고하는 철학에서 생겨난다." (61쪽)
언뜻 어려워보이지만, 그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에 주목하면, 역시 흐름의 맥락을 알 수 있다. 그가 두 번째 장에서 철학, 철학자를 끌고 들어온 이유는 다음 문장에서 다소 명백해진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철학의 대상으로 선포하는 바이다. (...) 순진하게 철학적인 우리들 앞에서 일상적 인간은 얼이 빠져 있는 듯이 보인다. (...) 일상인은 자신의 소유물, 재산, 안락 속에 안주해 있거나 혹은 그것들을 아쉬워한다. 일상인은 반성의 주체 또는 문화의 주체보다 훨씬 더 자연에 가까워 보인다. 좀 더 일상적인 여자는 좀 더 화를 잘 내고, 기쁨과 정열과 행동에 좀 더 몸을 쉽게 내맡기고, 광란의 열정과 관능, 생과 사의 관계, 자발적이며 기본적인 풍요로움과 좀 더 가깝다. 그러나 이런 것을은 참인가 거짓인가? 외관만인가, 실체도 있는 것인가? 피상적인가, 깊이가 있는 것인가? (...) 철학자들은 일상생활에서 자연과 예술의 그 어떤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을 발견한다. 자신의 철학을 글로 쓰지 않았던 최초의 직업적 철학자, 즉 소크라테스가 철학적 대화를 위해 일상적 사물들만을 말했다는 것(...)을 철학자들은 얼마나 여러 번 주목했던가!" (67~68쪽)
세 번째 장은 일상성의 중요성이 그간 철학자들에 의해 무시당해 왔음을 말하며, 일상성의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선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상성은 하나의 개념일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개념을 '사회'로 알기 위한 실마리로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은 일상을 전체 속에, 즉 국가, 기술, 기술성, 문화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가능하다." (85쪽)
그는 이런 방법이야말로 문제의 핵심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현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보로로 족이나 도곤 족과 같은 옛 부족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민족학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현대 세계의 이해를 위해 과거 부족을 연구하는 것은 흥미롭기는 하나, "이 길을 통해 우리가 우리 사회, 우리 시대, 우리 문명을 마침내 알게 된다는 가능성"(85쪽)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한다. 그런 방식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가 하고자하는 이야기는, 일상성의 분석이란 "그러니까 처음부터, 인생 및 물질적 문화에 대한 연구와는 구분되는 것"(87쪽)이라는 걸 밝히기 위한 것이다. 다음의 문장을 보자.
"우리의 분석은 그러니까 처음부터, 인생 및 물질적 문화에 대한 연구와는 구분되는것이다. 사건의 날짜를 기록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는 역사가에게 있어서는 그룹과 사회계급과 나라와 시대에 따라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으며 어떻게 실내장식을 했는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시골 옷장에도 어떤 양식이 있으며,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일상적인 물건들(그릇, 도자기, 대접 등)도 사회계층과 장소에 따라 서로 달랐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물건의 형태, 기능, 구조 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거나 또는 혼동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건의 기능과 형태들은 거의 무제한의 변형을 보였다. 형태와 기능과 구조의 어떤 통일성이 바로 양식이다. 과거 사회(그리고 우리 사회)의 이해를 위해서는 집, 가구, 의상, 식품 등을 각기 상이한 의미작용의 체계로 분류하면서 그것들을 분리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하나의 전체적인 단일한 개념 안에 그것들을 통합시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예를 들면 '문화'의 개념 같은 것으로 말이다." (87쪽)
이후에는 1946년에 쓰인 <일상생활 비판 입문>에 대한 논평이 상당 기간 이어진다. '일상'에 대해 다룬 이 수십 년 전의 책이 그때 당시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에 대해 말하며, 그 책의 내용이 순진하기는 했으나 지금에 와서 보면 그 내용이 증명되었다고 평한다. 그 책은 일상의 비참함과 일상의 위대성이라는 대조적인 두 장의 그림을 나타냈고, 또 하나, 축제의 문제를 제기하였다고 말을 꺼낸다.
"<일상생활 비판>은 축제의 농민적 기원과 일상이 정착된 사회에서의 양식과 축제의 동시적 쇠퇴를 증명했다. 양식은 문화로 타락했고, 그 문화는 일상(대중)문화와 고급문화로 세분되었으며, 이러한 분리가 문화의 단편화와 해체를 야기했다. 예술은 양식과 축제의 재탈환으로 간주되지 않고 점점 더 특수화되는 행위, 축제의 우스꽝스러운 모방, 일상을 변모시키지 못하는 일상의 장식품 등으로 간주되고 있다." (96쪽)
이런 식으로 그의 생각은 쭉 이어진다. 이쯤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일상성의 문제를 그렇게 간단하게 파악하지 않았다. 경제, 자본, 허영, 욕구, 만족, 광고, 소비, 메타언어... 그는 우리의 일상성을 결정하는 많은 것들에 대해 순차적으로 이야기한다. 이들은 유익한 이야기일 것이다. 아마도.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 게 시급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선 내가 일차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즉 문학과 관련한 일상성에 관심을 두기로 했다. 그 대표적인 부분이 플로베르의 글을 가지고 논술한 부분이다. 해당 소설은 플로베르의 미완성작인 <부바르와 페퀴셰>인데 아직 읽어보지 않은 소설이지만 앙리 르페브르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다음에 인용할 내용이 이 책 전체의 내용을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겠으나 그 방향을 이해하는 데에는 분명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그들은 누구인가? 두 사람의 필경사이다. 그들은 아주 일상적인 똑같은 삶만을 갖고 있다. 거의 동시에 그들은 소리 지른다. "시골로 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은 상호소통에 목마르고 굶주렸으므로 곧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 (...)그래서 두 친구는 샤비뇰에 갔다. 그들은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일상을 잊고, 일상을 초월하려 한다. 뭐든지 한 번 시도해 보고는 곧 다시 일상으로, 즉, 요리, 집, 이웃, 여자에게로 돌아오곤 했다. 그들은 시간을 어디에 할애하는가? 소비하는 데에 썼다. 그들이 만들지 않은 것, 그리고 사람 손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 물건들을 소비한다. 빵도, 가구도, 포도주도, 요리나 물건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작품, 문화, 모든 문화를 소비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모든 책들을. 부바르와 페퀴셰는 우리를 악몽 속으로 인도한다. 즉 문화, 책, 글로 쓰인 물건의 소비를 노골적으로 강요하는 그런 세계로. 이 악몽은 바로 우리 일상의 빵이다. (...) 원이 한 바퀴 돌아 단추가 완전히 채워진 뒤 그들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다시 시작하는 일밖에는. 그들은 그 전의 그들의 모습, 즉 필경사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그들이 결코 떠난 적이 없었던, 글자로 쓰인 물건들이 지배하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어떤 희망이 남았는가? 아마도 새롭게 어떤 상속을 받을 희망, 그리고 또 새로 시작할 희망이 남았을 것이다." (260~263쪽)
정독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이 책을 다시 읽게 되는 날에, 난 이 책의 제목 뒤에 '(2)'라는 단어를 단 채 또 하나의, 이것과는 완전히 다른 독후감을 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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