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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금목서를 찾아서 ㅡ 통영 충렬사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20. 10. 16.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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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내가 금목서를 보러 통영에 가자고 했다. 통영에 있는 대형 금목서를 보여준다고 했으니 이제 약속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이미 금목서에 꽃이 피기 시작했으니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난 해둔 말도 있고 해서 아내의 말에 따라 통영으로 갔다. 순전히 금목서를 보고자 떠난 여행이었다.


난 지난 여행 중에 통영 충렬사에서 거대한 금목서를 보았다. 내가 본 건 딱 두 그루로, 정당 좌우편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때 아내는 차에서 쉬느라 충렬사에 들르지 못했고 그래서 금목서를 보지 못했다. 나도 차에서 기다리는 아내 생각에 빠르게 걸으며 훑어보느라 충렬사를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었다. 이번 기회에 찬찬히 둘러볼 수 있었는데 알고 보니 충렬사엔 금목서가 꽤 많았다. 두 그루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도 하나 같이 크기가 큰 편이어서 정당 왼편에 있는 금목서만 유달리 큰 게 아니었다. 하나씩 세면서 걸었는데 여덟 그루 정도가 있는 듯했다. 이렇게 커다란 금목서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설명이 없었다. 동백나무보다 관심을 덜 두는 듯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충렬사 내부의 나무들은 대체로 쌍을 이루고 있었다. 길을 사이에 두고 양편에 배치해두었는데 동백나무, 금목서, 느티나무, 은행나무, 태산목이 그런 형태로 자라고 있었다. 주자가례에 그런 규칙이라도 쓰여 있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2.

통영 충렬사는 대개의 국내 사당이 그렇듯 정남향에 산을 등지고 있었다. 언덕에 있는 집, 특히 아파트는 걷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선호되지 않는데 성리학 시대엔 이렇게 높은 곳을 길지로 삼았다. 지대의 높이와 위상을 동일시한 것이다. 덕분에 이런 사당은 대체로 수려한 풍경을 자랑한다. 현대 건축물들이 앞을 가리기 전에는 정당 마당이나 누각에서 바다가 보였을 것이다.


정당으로 통하는 문인 내삼문은 솟을삼문 형태로 되어 있었는데 기둥이 팔각으로 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목조기둥뿐만 아니라 석조기둥도 팔각형태로 되어 있었다. 당시 팔각은 신성한 도형으로 아무 곳에나 쓸 수 없었다. 팔각에 대한 금제가 살아 있던 조선 중기에 이런 구조물을 사용했다는 건 그만큼 이 사당에 특별한 의미를 두었음을 뜻하겠다. 그 아래쪽에선 한 쌍의 해태가 팔각기둥을 받치며 초석의 임무에 매진하고 있었다. 


아내는 정당의 용마루에 주역 팔괘가 새겨져 있다며 놀라워했다. 기와 등에 팔괘 중 하나를 새겨 넣는 일은 종종 있지만 용마루에 팔괘 전체를 새겨 넣은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성리학을 기본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의 학자들은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팔괘를 새겨 넣어 전란 이후의 혼란한 상황을 헤쳐나가려 했던 것 같다. 놓치기 쉬운데, 충렬사 정문에는 태극이 그려져 있다. 사당 정문에 태극 문양을 그려 넣는 것은 당시의 관례였다. 이렇게 성리학의 뿌리 이념인 태극과 팔괘가 사당에서 완성되며 우리의 삶이 비극으로, 또 오만으로 흐르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었다. 


정당 용마루의 팔괘. 통영 충렬사, 2018. 8.14.


내삼문의 팔각 기둥과 해태. 통영 충렬사, 2018.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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