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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푸치노는 오후에 먹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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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만든 두 잔의 카페라테. 2020. 3. 5.


몇 년 전 로마의 타짜도르 카페에 방문했을 때 난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때는 점심을 넘긴 오후. 당시 나는 이탈리아인들이 오후에는 카푸치노를 마시지 않으며 카페에선 카푸치노를 주문조차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난 망설임 없이 카푸치노를 골랐다. 그런데 바리스타 역시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카푸치노를 만들어 내게 건네주었다. 수많은 관광객이 시도 때도 없이 카푸치노를 주문하는 통에 아침 시간 외에는 카푸치노를 만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적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탈리아, 특히 로마의 바리스타들은 아무 때나 카푸치노를 주문하는 관광객들의 행동을 분별없다고 여기지만 그래도 주문을 하면 카푸치노를 가져다준다. 


엘레나 코스튜코비치의 <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음식 이야기를 좋아할까?>에는 비상식적인 카푸치노 주문에 화가 난 종업원이 바 뒤에서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멍청이들, 피자와 카푸치노라니!"[각주:1] 하고 소리쳤다는 일화가 나온다. 카푸치노뿐만 아니라 카페라테도 그런 처지에 놓여 있다. 여기엔 우유가 상당량 섞여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소금, 지방, 산, 열>의 저자인 사민 노스랏도 아랍 출신인 까닭에 서양의 문화에 익숙지 못해서 오후에 우유를 주문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에서 "아침 식사 이후에 우유를 마시는 건 잘 보아줘도 어린이 같은 행동이고 최악의 경우엔 혐오스럽게"[각주:2] 보인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탈리아인들은 카푸치노나 라테처럼 우유가 들어간 음식을 아침 식사용으로 생각한다. 모든 유제품을 그렇게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치즈는 아침에 먹지 않는다. 또 음식 간의 조합도 중시한다. 볼로냐의 유명 셰프, 마리오 추를라는 레스토랑 개점 이후 겪은 가장 최악의 일로 한 미국인이 코카콜라를 주문했던 걸 떠올렸다. 그 에피소드에서 미국인은 토르텔리니 인 브로도와 오븐에 구운 칠면조, 코테키노, 참포네, 렌즈콩 퓌레 같은 정통 이탈리아 요리를 주문하고는 그와  함께 마실 음료로 "초콜릿 음료!"를 외치고 말았다. 미국인은 자신이 잘못된 음료를 주문했다는 걸 곧장 깨닫고는 정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코카콜라도 괜찮습니다."[각주:3] 마리오 추를라는 미국인이 자신의 조국을 해방시켜 주었다는 고마움이 없었다면 그 모독을 참을 수 없었을 거라 말했다.


이탈리아인을 비롯한 서양인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런 식의 반응을 쉽게 보인다. 각 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관습적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일정한 기대를 하고 또 그에 반응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우리가 정한 마음의 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놀라거나 경계를 하게 된다. 이를 인지심리학에서는 심적 갖춤새(mental set)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고기쌈을 먹거나 무지개떡에 김치를 얹어 먹는 외국인을 보면 우리도 비슷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신발을 벗지 않은 채 침대에서 잠을 자는 서양인을 보면 놀라움을 넘어 때로 역겨움을 느끼는데 그런 반응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이탈리아인들이 프랑스인들의 크림을 넣은 알리오 올리오에 발끈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코스튜코비치는 유럽연합의 브뤼셀 입법부에서 피자를 굽는 오븐의 온도를 250도로 제한하는 법안을 마련하려 하자, 이탈리아 전역에서 폭동에 가까운 반발이 일어났다는 보도를 인용했다. 이탈리아인들의 주장에 따르면 나폴리의 마르게리타 피자는 정확히 485도의 장작불 오븐에서 60~90분 동안 구워야 나무 향기를 머금은 진짜 피자로 탄생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지 않은 피자는 "성스러운 이름을 도용하려는 어떤 비열한 시도"[각주:4]에 불과하다. 


이제 좀 감이 잡힌다. 내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오전 식사에서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 이유는 여행 내내 관광호텔에서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호텔은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때우는 이탈리아인 본연의 방식이 아니라 외국 관광객을 대하는 방식으로 나를 접대했다. 그래서 내가 했던 이탈리아 여행은 안마의자에 앉아 패스트푸드점에서 주문한 피자를 먹으며 <걸어서 세계 속으로>의 이탈리아 편을 시청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선 내 안의 그 어떤 마음의 관습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 소고기를 얹은 파인애플 피자를 먹으며 이탈리아 본고장의 요리를 맛보고 있다고 생각해도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여행이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수록 훌륭한 것이겠지만, 어떤 사람에게 그런 여행은 집에서도 체험 가능한 가상 현실과 다르지 않다. 난 아직까지는 그런 이질감을 좋아하는 쪽이다. 그러니 이제 늦은 오후에 방문한 이탈리아의 어느 한적한 작은 카페에서 조금이나마 우유가 섞인 커피를 마시고 싶어진다면, 난 참으로 난감하다는 듯한 제스처를 보이며 주저하듯이 '......마키아토'라고 말할 것이다.



  1. 엘레나 코스튜코비치 <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음식 이야기를 좋아할까?> 김희정 옮김 (랜덤하우스 2010) 364쪽 [본문으로]
  2. Samin Nosrat "Salt, Fat, Acid, Heat" (Simon & Schuster 2017) p.7 [본문으로]
  3. 엘레나 코스튜코비치 <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음식 이야기를 좋아할까?> 김희정 옮김 (랜덤하우스 2010) 411쪽 [본문으로]
  4. 같은 책 51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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