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이상섭 번역 <맥베스>에 해설을 달다, 종소리가 들리는 곳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9. 12. 19. 23:23

본문

1. 

"나머지는 내게 있어. 

포구마다 부는 바람, 

나침판에 적혀 있는 

지점마다 부는 바람.

밀짚처럼 바짝 말려

지붕처럼 기운 눈에 

밤낮으로 자지 못해 

저주 속에 살게 되지."


ㅡ 역자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운율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새롭게 번역했다고 강조했다. 훌륭하고 가치 있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다만 문제는 운율에 중점을 두다 보니 읽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뜻을 알아듣기 어려운 부분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특히 시를 많이 접해 보지 못한 독자는 이해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위의 구절이 그런 예시다. 그냥 읽어나가다 보면 앞쪽에 위치한 네 개의 행이 하나의 문장으로 읽히지 않고 각각의 독립적인 문장으로 읽힌다. 하지만 위 네 개의 행을 독립적인 문장으로 해석하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위 문장은 '포구마다 부는 바람과 나침판에 적혀 있는 지점마다 부는 바람이 모두 자신에게 있다'는 뜻이지만 설명이 없으면 언뜻 그렇게 이해되지 않는다(또한 위 예시의 마지막 네 개 행은 앞으로 마녀가 맥베스에게 가할 저주를 뜻한다).


다른 출판사의 역자는 운율보다는 이해를 중시하여 위 예시를 다음처럼 번역했다. 


"나머지 바람은 다 내 거야. 

바람 부는 바로 그 항구들도 

선원의 지도 위에 나타나는 

바람 가는 구역도 다 내 거야. 

건초처럼 그놈을 말릴 거야. 

초가집 지붕 같은 눈꺼풀에 

밤낮으로 잠은 아니 올 거야."


다음의 유명한 문장도 그런 예의 하나로 들 수 있다.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아. 

인생은 그림자 놀이, 한동안 무대에서 

우쭐대고 안달하다 다시는 소식 없는 

불쌍한 광대. 소음과 광란이 가득하고

아무런 뜻 없는 바보 이야기."


'짧은 촛불, 그림자 놀이, 불쌍한 광대, 바보 이야기' 같은 단어들은 모두 '인생'을 묘사하는 데 쓰이고 있는데, 설명이 없으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역자인 이상섭 교수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그는 학술적 정확성보다는 우리말의 생리적 운율에 가치를 두었다. 선택은 독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




2.

"마녀들: 맑은 건 더럽고 더러운 건 맑구나. / 더러운 바람과 안개 속을 떠다니자."

(...)

"맥베스: 이토록 더럽고 맑은 날은 처음 보겠소."


ㅡ 맥베스의 첫 대사는 "이토록 더럽고 맑은 날은 처음 보겠소"이다. 첫 대사에 '더럽고 맑은 날' 같은 어색한 표현을 한 것이 의미심장하다. 맥베스가 이런 어색한 표현을 쓴 이유를 마녀의 주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녀들은 맥베스에게 마법을 걸고자 하는데 이때 "맑은 건 더럽고 더러운 건 맑다"고 말한다. 이는 맥베스가 마녀의 마법에 걸렸음을 암시하는 장치로 보인다. 실제로 마녀는 맥베스가 등장하기 직전에 "쉿, 조용히. 주문이 완성됐다"고 말한다.




3.

역자가 '학술적 정확성보다는 우리말의 생리적 운율'을 중시했다고 하였는데, 그렇다고 정확성을 중시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더러운 바람과 안개 속을 떠다니자"를 예로 들 수 있다.


1번에서 언급했던 다른 출판사의 역자는 위 예시의 문장을 "탁한 대기. 안개 뚫고 날아가자"고 번역했다. '뚫고' 날아간다는 것은 그곳을 벗어나게 됨을 암시한다. 따라서 탁한 대기와 안개를 뚫고 날아가자는 건 탁하지 않은 곳, 즉 맑은 곳으로 가자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이건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진 비극적 운명을 벗어나도록 노력하자는 주장일 수 있다. 그런데 그 문장은 마녀의 대사였다. 마녀가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일견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따라서 안개를 '뚫고' 날아가는 것보다는 그곳을 '떠다니는' 것이 더 어울려 보인다. <맥베스>에서 마녀의 임무는 맥베스의 운명을 "더러운 바람과 안개 속을 떠다니"도록 만드는 것이다.




4. 

"달이 졌군요. 시계 소리 못 들었어요."


ㅡ 이 소설의 시대 배경은 11세기의 스코틀랜드이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이 셰익스피어는 <햄릿>과 <맥베스>에서 매시간마다 들려오는 종소리를 표현했지만 11~12세기경의 덴마크와 스코틀랜드에 실제로 그런 체계가 갖추어져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참고: 삶의 양식/문학, 철학] - 이상섭 번역 <햄릿>에 해설을 달다, 비극적인 삶의 조건").


만일 당시 실제로 매시간마다 종이 울렸다면 그건 물시계나 해시계 등을 이용해 시간을 확인한 후 사람이 직접 울리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시간의 탄생>의 저자인 알렉산더 데만트는 "매시간마다 타종으로 시간을 알리는 시계에 대한 언급이 13세기 영국 기록에 남아 있고, 14세기 초에 북이탈리아에도 있었다고 전해진다"[각주:1]라고만 서술했다.


한편 종은 내리고자 하는 신호에 따라 리듬을 달리하여 울리기도 했다. 이 시대의 종은 일종의 신호이며 위안이자 명령 체계였다. 윌리엄 1세 시대의 런던 내 종탑에선 저녁 8시마다 종이 울렸는데, 이는 야간 통행금지 및 모든 성문의 폐쇄를 알리는 신호였다. 


종이 단순히 명령 체계로 쓰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특정한 시간에 여러 종탑에서 일제히 울리는 종소리에 축복과 안도를 느꼈을 것이다. 이 시대는 미신이 지배했던 시기였고, 그래서 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에도 악마를 물리치는 신성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당시 주민들은 종소리가 들리는 곳 너머에서 살기를 꺼려했다. 종소리가 신호라면, 그건 평안과 안도의 신호였을 것이다.




5. 

"이런 초자연적 유혹은 나쁠 수도 좋을 수도 없으리라."


ㅡ 맥베스를 관통하는 하나의 사건은 마녀의 예언와 환영이며, 이는 곧 당시 사람들이 미신에 쉽게 흔들렸음을 알린다. 실로 중세는 미신이 지배하던 사회였다. 미신이 일으키는 불안은 사람들을 교회의 성장으로 이끌었다. 오늘날 미신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맥베스>로부터 약 900년이 흐른 현대에도 미신이 떠돌고 있으며 그로 인해 칼 세이건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을 출간해야 했다. 그런데 저자인 칼 세이건도 암암리에 언급했듯, 과학을 위협하는 것은 미신이나 초자연적 현상 그 자체보다는 스스로를 과학처럼 꾸미는 것, 사람들이 과학이라 믿어 버리는 어떤 것이다.



  1. 알렉산더 데만트 <시간의 탄생> 이덕임 옮김 (북라이프 2018), 184쪽 [본문으로]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