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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섭 번역 <셰익스피어 전집>, 마늘의 취향에 관한 문제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9. 12. 16.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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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말하는데, 사랑하는 배우들, 양파나 마늘은 먹지 마. 숨이 달콤해야 되니까." 

ㅡ 윌리엄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 (번역 이상섭)



1.

며칠 전 프랑스 남부 가정식인 그라탱 도피누아를 만들 때 용기에 마늘을 문질렀다. 레시피가 그렇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인 셰프는 마늘로 용기 이곳저곳을 문지른 후 남아 있는 약간의 마늘을 조리 마지막 즈음에 뿌리라고 조언했다. 또다른 프랑스인 셰프는 통마늘을 용기에 문지르기만 했다. 마늘 사용은 그걸로 끝이었다. 마늘을 더 넣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우리나라 셰프들도 그라탱 도피누아를 만드는데 이때 프랑스인들보다는 많은 양의 마늘을 넣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는 음식 조리 시 서양에 비해 상당히 많은 양의 마늘을 넣는 습성이 있는데, 프랑스 요리를 할 때도 그 습성을 그대로 이어 가고자 한 것이다. 이런 변형 레시피를 따르는 국내 셰프들은 프랑스인 셰프들이 하듯 마늘을 문지르기만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늘 향을 못 느낀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전통 음식에 들어가는 많은 양의 마늘을 보면 그럴 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런 변형 레시피로 만든 음식을 두고 그라탱 도피누아라 불러야 하는지는 의문스럽기도 하다. '도피누아'는 프랑스 남동부에 있는 도피네 지역을 뜻한다. 마늘 양에서 이 정도의 차이가 난다면 아무래도 '그라탱 코레아노'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2.

영국인인 조지 오웰은 자신의 자전적 소설에서 빵과 그에 문질러 먹을 마늘 한 개를 샀던 경험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마늘을 빵에 문질렀던 이유가 방금 음식을 먹었다는 환상을 주기 때문이라고 썼다. 원서가 아니라 번역서로 읽었기에 조지 오웰이 정확히 무슨 의미로 그런 언급을 했는지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해 마늘의 향과 맛이란 본디 '요리한' 음식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빵에서 마늘 향이 나면 자신이 단순히 빵을 먹은 게 아니라 요리된 어떤 음식을 먹었다는 환상을 품게 된다는 뜻으로 한 말인지, 아니면 마늘은 맛과 향이 강하므로 마늘 바른 빵을 먹으면 무언가를 먹었다는 환상이 오래 지속된다는 뜻으로 한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조지 오웰은 자신의 구차했던 삶을 마늘 바른 빵을 먹었던 지난 경험으로 묘사했다. 


재미있게도 조지 오웰이 마늘의 경험을 묘사했던 곳은 20세기 초의 프랑스 파리였다. 프랑스에서 음식에 마늘을 사용하는 곳은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프로방스 지역과 그 부근이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남부의 라타투이가 있다. 페스토, 알리오 올리오, 라비올리처럼 마늘을 쓰는 이탈리아 요리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파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음식에 웬만해선 마늘이 들어가지 않는다. 조지 오웰이 재료를 끓인 뒤 소금 친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영국인이었다는 걸 감안해야겠다. 



3.

이상섭 교수가 번역한 <셰익스피어 전집>은 내가 소유한 책 중에서 단일 책으로는 가장 큰 부피를 자랑한다. 크기로는 <더 타임스 세계사>를 뛰어넘지 못했지만 두께를 포함한 부피를 따지면 <셰익스피어 전집>이 더 앞선다. 그만큼 거대하다. 심지어 그림 하나 없는 문자만으로 이 정도 부피를 이뤄냈다. 


원서도 아닌 번역서에 어떤 의미를 둘 수 있을까? 아무리 운문으로 번역을 했다 하더라도 본연의 뜻은 훼손된 수밖에 없는 것이 번역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책의 가치는 훼손될 수밖에 없다. 사실 단점만 생각하면 모든 것이 불필요해 보인다. 허무, 무상이라는 건 다른 것이 아니다. 무언가의 어두운 면, 단점만을 볼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 그러한 것이다.


낙천주의로 바라보자는 것은 아니다. 대책 없는 낙천주의의 문제점은 볼테르의 <캉디드>까지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다. 결국 필요한 건은 균형 있는 시각이다. 우리가 말하는 영혼의 성장은 삶의 균형을 이뤄내는 과정으로 단순화할 수 있다.


하나의 균형으로 내가 성년이 된 이후로 지금껏 셰익스피어의 번역서를 단 한 권도 구매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다. 흔한 '4대 비극'도 참아왔다. 아마도 이런 것을 기다려 왔던 것은 아닐까? 한 명의 번역자가 일관성을 지닌 채 번역해 낸 책. 물론 대학원생의 참여 없이 혼자 번역해 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단일 번역자로 되어 있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의 번역을 설명하는 내내 '나'라는 주어를 사용했고 난 그 의미를 믿기로 했다. 


다른 균형은 완전히 새롭게 낸 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역자 이상섭 교수가 오래 전 번역해 출간했던 셰익스피어의 희곡집이 거의 그대로 실려 있었다. 새로 책을 내며 바꾼 부분도 있었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것을 아주 오랜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는 대작을 이해하는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이미 모두 출간했던 것을 그저 하나도 묶은 것도 아니요, 기존의 학술적 번역을 반복했던 것도 아니다. '사느냐, 죽느냐'도 아니고 '살아 부지할 것인가, 죽어 없어질 것인가'도 아니고 '존재냐, 비존재냐'다. 셰익스피어의 운율과 우리 문학의 운율을 살린 번역이다. 역자는 이 운율을 셰익스피어 전 작품에서 일관되게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4.

외국 요리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요리될 때 레시피에 변형이 일어난다. 그건 일종의 번역의 효과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늘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라탱 도피누아에 마늘을 잔뜩 넣는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푹 익힌 걸 좋아한다고 해서 파스타 면을 너무 오래 익힌다면 아마도 그건 본연의 지방 요리가 아닐 것이다. 프랑스 요리인 프리카세에 다진 마늘을 잔뜩 넣고, 영국 희곡에 등장하는 왕비를 중전으로 번역한다면 그건 아마 원래의 것과는 다른 무엇일 테다. 또 아무리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했다 하더라도 그 지방에서 난 재료를 쓰지 않는다면, 그 지방의 재료라고 해도 신선도가 다르다면 어떤 맛과 향이 다를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원문과 번역문의 차이와 유사할지도 모른다. 


학술적 번역에도 매력이 있고 퓨전 요리에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으므로 원조와 원문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다만 염두에 두고 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엔 차이가 있다. 셰프가 크렘 브륄레를 만들 때 필요에 따라 캐러멜라이즈를 진하게 한 것과 초보자가 캐러멜라이즈 도중 태워먹은 것엔 분명히 차이가 있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차이를 인지하기란 쉽지 않다.



4.

셰익스피어의 번역서를 읽는 이유를 이런 관점에서 엿볼 수 있다. 김치볶음밥이 너무 맵다면 서양 셰프는 김치나 고춧가루를 줄일 것이고,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김치볶음밥과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서양인들도 김치볶음밥을 즐길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마지막 균형의 문제다. 마늘을 넣는다. 그런데 얼마나? 어떤 이는 마늘 자체가 싫어 조금도 쓰지 않는다. 심지어 음식에 마늘을 넣는 행위 자체를 비난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문질러 바르기만 하고 어떤 이는 살짝 으깬 뒤 통으로 넣는다. 누구는 편을 썰고 누구는 다져서 넣는다. 단순히 귀찮다는 이유로 모든 요리에 다진 마늘을 넣는 사람도 있다. 번역서를 읽는 일은 이런 선택 어딘가에 놓여 있다. 번역서를 고르고 읽는 일은 마늘의 취향에 관한 문제다. 아마도 삶 자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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