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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소설들, 어슴푸레한 공간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9. 10. 18.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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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 반에서 2시 사이, 보통 그 시간이 되면 아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거의 항상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범위를 두고. 시계라도 작동하는 것일까? 귀를 기울이면 아이의 끙끙거리는 소리에 뒤섞여 아내의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곧이어 잦아드는 아이의 울음소리. 난 방의 불을 끄고 아내와 아이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간다. 처음 몇 번은 주변이 너무 어두워 발치에 있는 물건에 부딪히기도 했다. 갑자기 깔린 어둠에 적응하려면 한동안 기다려야 했지만 나에겐 그런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부딪치지 않는다. 보이지 않아도 이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어느 정도 비켜 가야 하는지 알고 있다. 조심스레 방문을 연다.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잠시 기다리면 희미한 선처럼 윤곽이 먼저 드러나다가 아내와 아이들의 형상이 어슴푸레 보이기 시작한다. 옆으로 누운 채 마주 안고 있는 아내와 둘째,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첫째. 그제야 난 이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침대에 누울 수 있다. 암적응. 신기한 일이다.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소설을 몇 권이나 읽었더라? 같은 책을 몇 번이나? 그의 소설은 비슷한 듯하여 혼란스럽다. 인물들은 항상 거리의 카페를 배회하고 기차에 오르거나 장의자에 눌어붙은 채 열차를 떠나보낸다. 기억에서 잊힐 사소한 인물이 먼저 등장하고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던 청춘 시절의 기억이 우연을 가장하며 떠오른다. 악연들, 그 무리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스티오파 패거리,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의 번데기 클럽, <지평>의 즐거운 도당, <신혼여행>의 탐험가 클럽...... 그리고 스키 강사들. <신혼여행>,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지평>에 등장하는 스키 강사들은 서로 어슴푸레하게 섞인다. 또 주인공들이 들고 다니던 몰스킨 수첩...... 각각의 주인공들은 불현듯 떠오른 지난 오랜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옷 한쪽에 검정 몰스킨 수첩을 넣어서 다닌다. <지평>의 보스망스,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의 다라간...... 왜 하필 몰스킨일까? 프랑스라는 지역 배경 때문이다. 지금의 몰스킨과는 별 연관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인 당시 프랑스의 몰스킨 수첩. 하지만 그런 뒤늦은 기록은 헛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추억 속 인물들은 이미 죽거나 사라졌고 만나더라도 기억하지 못한다. 수첩은 버려질 것이다. 정답고 따뜻한 눈길을 보냈던 그의 목소리, 나를 기다려 주었던 유일한 여자와 함께.


과거의 기억은 불이 꺼진 방처럼 어둠에 잠겨 있다. 그때의 기억을 추억해 내려면 서둘러선 안 된다. 마치 암적응을 하고자 눈을 뜬 채 먼 곳의 어둠을 바라보는 천체 관측자들처럼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의 기다림엔 실체가 있었다. 내가 실수로 소리를 내면 끙끙대는 울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들의 기다림은 한낱 꿈에 불과하다.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아무리 기다려도 손에 잡히지 않는 그저 상상이나 해보는 꿈...... "모래는 기껏해야 우리의 발자국을 몇 초 동안밖에 간직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한때 그곳에 발자국이 있었다는 걸 기억한다. 그게 누구의 것이었는지도. 파트리크 모디아노는 그 시간을, 그 사람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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