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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성 생크림으로 만든 딸기 케이크,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9. 9. 28.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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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었다. 케이크 시트의 각 층에도, 생크림에도, 케이크 장식에도 딸기를 넣었다. 생딸기를 구하기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냉동 딸기를 사용했는데 딸기에서 생각보다 훨씬 많은 양의 수분이 흘러나와 아이싱에 어려움을 겪었다. 생크림에 색을 넣을 때 보통 색소를 사용하는데 난 수제 딸기잼을 넣었다. 원하던 분홍색에선 멀어졌지만, 대신 딸기 알갱이가 알알이 들어와 생크림에 박혔다.


이번에도 100% 동물성 생크림으로 아이싱을 했다. 식물성 크림보다 건강에 좋고 맛도 뛰어나지만 식물성 크림보다 윤기가 덜하고 열에도 상대적으로 취약하여 상온에서 모양이 쉽게 틀어진다. 순수 동물성 생크림으로 아이싱을 하는 게 쉽지 않지만 겉모양보다는 다른 걸 택했다. 그나마 실내 온도가 많이 떨어져서(아이싱 당시 23도) 내 실력에 이 정도라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여름철엔 순수 동물성 생크림만으로 모양내기가 쉽지 않다. 그 모양을 오랫동안 유지하기는 더욱더. 



2.

만일 한여름에 순수 동물성 생크림만으로 윤기가 흐르는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어 낸다면 그는 상당한 실력자일 것이다. 하지만 식물성 크림을 쓰거나 동물성 생크림에 조금 섞는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이 많을 거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식물의 잎도 그렇고 과일 표면도 그렇고 사람 머리카락은 물론 과자나 케이크도 그렇다. 표면이 유난히 반짝거린다면, 색이 유난히 강렬하다면 무언가를 뿌렸거나 섞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런 첨가물은 식물에, 동물에게, 우리에게 유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당장에는 반짝거리는 외면이 더 인정받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 길을 택한다.


이런 대중성의 추구를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삶에서든 요리에서든 어느 정도 융통성이 필요하다. 변수는 다양하고 환경은 변화무쌍하니 완벽을 추구해선 버티기가 쉽지 않다. 물론 일견 고지식해 보이는 선택을 하여 불멸의 지위에 오르는 이들이 있다. 명예, 영원성 같은 고귀한 가치들은 대개 그런 이들을 기다린다. 하지만 먼 미래의 불확실한 명예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게 당장의 박수갈채가 없다면? 당장의 굶주림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따라서 식물성 크림을 섞거나 휘핑 크림을 썼음에도 순수 동물성 생크림으로 케이크를 만들었다며 거짓 홍보만 하지 않는다면, 선택은 그저 그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결론은 다소 이상적이다. 실제의 세계엔 거짓 홍보가 상당하고 선택자는 참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려우며 애초에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안다 하더라도 선택의 폭은 제한적이다. 훌륭한 어떤 것은 대개 고가인 데다가 많은 돈을 주고도 구매하기 어려울 만큼 구경하기조차 쉽지 않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상상하는 선택의 자유는 환상일 가능성이 높다. 



3.

이 케이크를 들고 2시간가량 이동을 해야 하는데 모양이 그대로 잘 유지될지 모르겠다. 얼음을 가득 채워 넣은 아이스박스에 넣어 갈 생각이다. 급커브나 돌지 않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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