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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자가 보수 작업 ㅡ 식민지 시대의 종언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9. 5. 3.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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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 화장실에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대개 내가 초래한 문제로, 원인은 물을 맹신하여 부주의하게 다룬 데에 있었다. 난 물을 너무 사랑하여 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했다. 몸을 씻을 때 뿐만 아니라 화장실 바닥과 벽을 씻을 때도 썼고 심지어 실크벽지로 된 화장실 천정을 닦을 때도 사용했다. 난 화장실에 뿌려둔 물기가 화장실 문을 열어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를 거라 생각할 만큼 어리석었다. 하지만 창문도 없는 화장실의 물기는 빠르게 마르지 않았고, 그래서 생명의 기원인 물은 그곳에 선캄브리아기의 끈질긴 검은 생명체, 곰팡이를 탄생시키기로 마음먹고 말았다.


물 묻은 실크 벽지의 겉면을 닦아내는 건 별 소용이 없었다. 물은 실크 벽지 내부로 스며들어 한참을 머무를 수 있었고 덕분에 그곳에 검은 생명체의 안식처를 마련해 줄 수 있었다. 구석진 곳에 위치한 덕에 수분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양변기 뒤쪽의 실리콘도 검은 생명체의 새로운 정착지였다. 욕조 바깥에 커튼을 달고 고양이 화장실용 배관을 천장 쪽으로 길게 연결하자 번식은 더 빨라졌다. 커튼과 배관이 화장실 습기가 빠져나가는 데 악영향을 준 것이다. 천장에 맞닿도록 설치한 배관은 화장실 전구의 불빛마저 닿지 않는 천혜의 음습한 거주지를 곰팡이에게 마련해 줄 수 있었다. 내가 물청소를 하면 할수록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하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은 왕성해졌다. 아마도 그들은 나를 '위대한 검은 식민지 시대'를 이끌었던 전설의 영웅으로 기억하리라. 


할아버지에게서 손주로 이어졌을 그 이야기는 무척 흥미진진했을 것이다. 그들을 번영의 시대로 이끌었던 영웅이, 어느날 갑자기 그 시대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끝내겠다며 코와 입을 흰 마스크로 가린 채 배반의 칼을 들고 나타났으므로. 한때 영웅으로 불렸던 이 인간 사내의 바람은 구전으로 전해지던 자신의 신화가 이제 전할 자도, 전해 들을 자도 없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었다.



2. 

원래 화장실 공사를 전문 시공업체에 맡기려고 했었다. 그런데 시공 업체에 맡기기 전에ㅡ어차피 다 철거해야 한다면ㅡ내 마음대로 뜯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도구도 충분하여 몇 가지 자재만 더 구입하면 될 것 같았다. 예를 들어 벽지나 실리콘 같은 것. 내가 일으킨 문제이니 내가 끝내겠다는 심리도 있었다. 하는 데까지 해보고 그때 가서 업체에 맡겨도 늦지는 않을 것 같았다.


화장실 천장을 어떻게 마감할지가 고민이었다. 요즘 많이 사용하는 아치형의 플라스틱 천장재를 구매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천장을 열어 안쪽을 살펴보니 공간이 충분했다. 따라서 목재 천장을 뜯어낸 뒤 화장실 타일 윗면에 플라스틱 천장재를 올려두는 형태로 작업을 하면 될 듯했다(전문 시공업체도 이런 방식으로 작업한다). 기존 몰딩도 뜯어내고 실리콘으로 마감할 생각이었다. 길이 측정을 잘 하고 환풍기 구멍만 잘 뚫으면 설치에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결국 실크 벽지 마감으로 마음을 정했다. 플라스틱 천장이 '한 번 해보는' 정도로 구입하기엔 비용이 작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실크 벽지는 가격이 저렴했다. 벽지는 발라본 경험이 많으니 보다 수월할 거란 생각도 했다.


문제는 작업자가 나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천장을 나 혼자 도배할 수 있을까? 괜한 낙천주의가 발동하여 할 수 있을 거란 에너지를 심어 주었다. 천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면적이 작잖아,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난 풀이 발린 벽지의 무게를 상당히 간과하고 있었다. 그 대가로 난 실로 상당한 고생을 해야만 했다. 천장에 벽지를 바르다 말고, 벽지를 바닥에 모두 떨어뜨린 채, 이걸 혼자 해내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이 일을 혼자 해낼 수 있었던 건 도구를 사용하는 호모 하빌리스를 먼 친적으로 둔 덕분이었다. 모든 걸 포기할 뻔한 그 좌절의 순간에, 난 발코니에 놓아 두었던 두 개의 길이 조절식 옷걸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벽지를 천장에 대고 지지해 주었던 그 두 옷걸이의 도움으로 난 몇 시간의 악전고투 끝에 천장 도배를 끝마칠 수 있었다. 


1차로 실크 벽지를 뜯어낸 화장실 천장의 모습. 천장 경계선 부근에 벽지 안쪽까지 스며든 곰팡이의 흔적이 보인다. 2019. 3.27.


실크 벽지로 도배를 끝낸 천장의 모습. 풀바른 벽지를 이용해 발랐다. 좁은 면적이라 혼자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혼자서 끝내긴 했으나 앞으로 천장 도배를 혼자서 하지는 않을 것 같다. 2019. 3.31.



3.

천장 도배를 워낙 힘들게 했던 탓에 욕조의 실리콘 처리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느껴졌다. 실리콘 작업은 바르는 것보다 제거하는 게 더 어려웠다. 타일 안쪽으로 구멍이 깊게 나 있는 탓에 실리콘을 벗겨내기가 쉽지 않았다. 실리콘 겉면만 대충 작업하고 싶지 않아 타일 안쪽의 실리콘까지 모두 제거하려다 보니 상당한 시간을 소모하게 되었다. 이에 비하면 실리콘을 바르는 일 자체는 쉬운 편에 속했다. 물론 얼마나 보기 좋게 바르는가 하는 건 다른 문제이다.


타일 안쪽까지 실리콘을 주입하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양의 실리콘을 써야 했다. 기본 크기의 백색 실리콘을 두 통 반쯤 사용했다. 작업 시 가장 주의했던 것은 실리콘에 틈이 생겨 물기가 실리콘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과 실리콘 겉면에 주름이 잡히는 현상이었다. 실리콘은 몇 분만 지나면 경화가 시작되는데 그 이후 손을 대면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게 된다. 고수의 실리콘과 하수의 실리콘은 마감에서 확연한 차이가 드러나는데 내가 '쏜' 실리콘에는 여전히 하수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욕조 주위의 실리콘을 뜯어낸 모습(부분). 2019. 4. 3.


실리콘을 바른 이후의 모습(부분). 2019. 4. 3.


욕조 주위의 실리콘을 뜯어낸 모습(전체). 2019. 4. 3.


실리콘 시공을 완료한 모습(전체). 2019.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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