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해군에는 저녁이 돼서야 들어올 수 있었다. 남해군의 3번 국도와 1024번 지방도를 거쳐 19번 국도에 이르는 길은 가로등이 없어 차량의 전조등에 의지해야 했는데, 차를 운전하는 내내 마치 제주도의 어두운 외곽도로를 달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만 그때와 달리 차에는 나 혼자였다. 오후 7시를 조금 넘겼을 뿐이었지만 달리는 차량도 나 혼자일 때가 많아 때때로 상향등을 켜 먼 곳을 비춰 보아야만 했다.
숙소로 정해둔 남해군의 읍내로 길을 재촉하다 보니 다음날 보러 가기로 한 남해군의 시골집 인근을 지나치게 되었다. 난 유턴을 한 뒤 시골집 인근의 가장 가까운 공영주차장에 차를 댔다. 저녁의 시골집은 어떤 분위기일지 궁금했다. 차로 시골집까지 이동할 수 있었지만 밤길을 직접 걸어보고 싶었다. 밤길이 두렵지는 않을까? 어둠 속에서 짖어대는 개의 울음소리가 무섭게 들리지는 않을까?
내가 보러 갈 시골집ㅡ집 주인이 촌집이라 명명했던 그 집은 남해군 읍내에서 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 말은 인근에 쉬이 이용할 수 있는 어린이집과 초등학교가 있다는 뜻이었다. 번잡한 번화가를 벗어났지만 그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이 시골집을 보러 오게 되었다. 게다가 이 시골집이 위치한 마을 앞에는 놀랍게도 편의점ㅡ세븐일레븐ㅡ까지 있었다. 시골을 잘 모르는 사람은 마을 앞 편의점에 놀란다는 사실이 의아스러울 것이다. 시골은 면소재지에도 편의점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골은 그런 곳이다.
이렇듯 외딴 마을이 아니라 남해군에서 가장 번화한 읍내가 가까웠고 마을 안쪽으로는 가로등까지 드문드문 서 있었지만 난 차에서 내리자마자 휴대전화의 플래시를 켜야 했다. 가로등 주위에만 빛이 내려앉았을 뿐 다른 곳엔 깊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박명이 마을 뒤쪽에 서 있는 작은 산의 날카로운 경계를 희미하게 들추고 있었고, 박명을 뒤로한 작은 산은 우주 속 암흑물질처럼 모든 빛을 차단한 채 끝 모를 공간을 기이한 방식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계속 보고 있으면 나까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깊은 밤, 홀로 밤하늘을 관찰할 때마다 몰려오던 공포심이 산 주위에서 흔들렸다. 걷다 보니 어느덧 갈림길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찰나, 어디선가 나타난 서너 마리의 개가 경직된 표정으로 날 노려보았다.
난 멀리 두었던 시선을 거둔 뒤 주변의 주택들을 바라보았다. 시골집들은 대부분 실내등을 켜 둔 채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동네는 아닌 듯했다. 어디선가 퇴비에 쓰이는 분뇨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촌집의 주인은 이곳에 와 퇴비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지금으로 봐서는 거짓말을 했거나, 아니면 봄에는 시골에서 거주를 해본 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2.
촌집의 주인은 젊은 부부로, 남해군에 이사온지 몇 달 되지도 않아 다시 이사를 나가려 하고 있었다. 겉으로 말하는 이유는 아내가 아파서ㅡ심각한 허리 통증이 있다고 했다ㅡ였는데 그걸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아내가 아프다는 건 사실일 수 있으나 시골을 떠나려는 이유가 온전히 그것 때문은 아닐 터였다. 인근 주민과의 불화가 원인일 수도 있었고, 시골살이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난 카페 운영이 잘 되지 않는 게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짐작했다. 집주인은 커피 가게를 운영하고자 자신이 소유한 촌집 몇 채를ㅡ총 다섯 채로 이루어진 촌집이었다ㅡ근린상가로 지정하여 카페로 만들어둔 상태였는데, 아무리 봐도 그곳은 카페가 잘 될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촌집이 위치한 곳은 평소 유동인구가 많거나 특정 계절에 관광객이 몰리는 명소가 아니었다. 별다른 볼거리가 없는 한적한 시골마을 끝자락에 카페를 여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주변의 그 누구도 이들 부부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하루에 단 한 잔의 커피를 팔더라도 생계유지가 가능한 사람들인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정성 들여 리모델링한 촌집을 일 년도 채우지 못한 채 떠나야 하는 사정은 안타까웠다. 어쩌면 내가, 아니 우리가 그다음 타자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난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촌집엔 불이 들어와 있었다. 평소 집을 비우고 있다는 집주인이 내일 방문하기로 약속한 나를 위해 하루 일찍 내려온 듯했다. 집 옆엔 가로등이 있어 집을 밝게 비추고 있었고 그 빛이 마당에 피어 있는 하얀 목련을 더 밝게 부각하고 있었다. 작지만 예쁘장한 마당이었다. 그런데 집주인은 그 마당을 주차를 해둔 상태였다. 북쪽을 면하고 있는 마당이었지만 촌집 지붕이 낮은 탓에 마당에 그림자가 오래 지지는 않을 듯했는데, 집주인은 마당 중앙에 모래와 기찻길용 목재를 깔아 주차장으로 쓰고 있었다. 차를 몰고온 손님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이런 외진 곳에 손님을 끌고자 했다면 주차 편의를 챙기기보다는 마당을 예쁘게 가꾸는 편이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올 손님은 약간의 걷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집주인의 선택이니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3.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조용한 탓에 셔터 소리마저 요란하게 들렸다. 인적이 드문 어두운 곳에 홀로 서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 느지막이 길을 나선 마을 주민에게 공포심을 줄까 두려웠다. 저 위대한 자연도 자신이 드러내는 경이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이 왜소한 인간에게 미안한 감정을 품고 있을지 궁금했다. 난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깃발은 언제나 그대로 있다는 걸. 흔들리는 건 언제나 내 마음이었을 뿐.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자연은 의식이 없어 의도한 바가 있을 수 없다는 걸 이성적으로 이해하기에. 하지만 상대가 사람이라면, 저 어두운 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면 난 다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에게서 불쾌한 의도를 발견한다. 마음이 불안한 상태에선 그런 심리가 극에 달한다. 그래서 그가 단순히 바람을 쐬러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우린 그를 의심의 눈으로 보게 된다. 눈이라도 마주쳤다면 그가 우릴 위협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밤은, 어둠은, 공포는, 다툼은, 피해의식은 언제나 우릴 그렇게 만든다. 이 고통스러운 운명을 벗어나는 소극적이고 안전한 방법은 관심ㅡ때론 인연이라 부르는 것ㅡ을 끊는 것이다. 보다 적극적이지만 위험한 방법은 우리의 이해가 타인의 피해의식을 감싸는 데까지 나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피해의식을 적극적으로 아우르기에 바빴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시골의 깊은 밤과 공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나? 난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시골의 어둠이 아니라 그 속에 스며들어 있는 가공의 존재였다. 난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두렵고도 스산한 마음이 그곳에 남아 주변을 서성였다.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