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은 갑자기 어두워졌다. 저물어가던 해가 먹구름에 가려지더니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천둥마저 치는 듯했다. 자동차의 전조등에 불이 들어오며 어두운 길을 비췄지만 편도 1차선에 인가도 없는 좁은 시골길을 분간하기란 쉽지 않았다. 난 여자를 살며시 돌아보았다. 여자는 정면을 응시한 채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낯선 남자를 옆 좌석에 태운 채 깜깜한 시골길을 달리는 게 두렵지는 않을지 궁금했다. 난 내가 여자가 아니고 그가 남자가 아니라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그녀가 낯설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여자였다면 휴대전화를 켠 채 전화통화를 하는 척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고성군 시골 주변인데 갑자기 날씨가 변하며 주변이 어두워지더니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며. 그리고 중년의 한 남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있다는 말을 꼭 남기겠지. 자동차의 라디오도, 네비게이션도 모두 꺼진 상태여서 요리한 빗소리만 소리의 부재를 메웠다. 하릴없이 난 이런저런 말, 서로의 개인사가 담겨 있지 않은 실무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이 그녀를 안심시킬 수 있는 한 방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적인 물음을 던진 건 오히려 여자쪽이었다.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요?"
"제가 생각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그녀는 내 나이를 듣더니 다소 놀라는 듯했다. 의례적인 반응일 수도 있었다.
"그래요? 제 아들하고 나이가 비슷할 거 같았는데......" 그녀는 아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들이 몇 년 전에 결혼을 해서 올해 삼십대 초반인데, 너무 현실주의자예요......"
"아드님은 어디에 사세요?"
"창원에 신혼집을 차렸는데...... 인생을 조금 즐길 줄도 알아야 하는데...... 뭔가 사고 싶은 게 있고 또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선택을 못하는 거예요......"
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난 그녀가 일부러 날 쳐다보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귀밑부터 올라온 한 다발의 흰머리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은 뒷머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50대 후반쯤일까?
"사장님을 보니까, 꼭 제 아들을 보는 거 같아서......"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전혀요. 전 제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온 걸요. 오히려 그게 문제라면 문제지요."
난 그녀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했다. 난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어 이곳까지 왔지만 그녀의 눈엔 여전히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웃으면 한량 같고, 울면 좀스러워 보이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바라보는 다른 사람의 인생이었다.
점차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구름 사이로 태양이 드러나는 듯했다. 마침 언덕으로 둘러싸인 좁은 길을 벗어나 주변이 한층 밝아졌다. 놀랍도록 빠르게 바뀌는 남쪽의 날씨 변화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어느 조용한 마을의 부딪힐 것같이 좁은 골목길을 조심스레 지나친 뒤 차를 세웠다.
"이곳이에요."
나는 가는 빗줄기를 맞으며 그녀가 안내하는 집으로 향했다. 잔디가 깔려 있는 제법 큰 마당 뒤로 세 채의 단층 건물이 놓여 있었다. 우선 가장 큰 건물로 들어갔다. 방 2개와 부엌 1개로 구성된 공간이 보였다. 거실이라 부를 만한 곳은 없었다. 난 우선 창문을 살폈다. 단창 아래로 그를 간신히 지지하고 있는 얇은 벽이 보였다. 아무리 남쪽이라도 이 상태로는 겨울을 보내기 어려워 보였다. 여름용 별장에 어울렸다. 지금 주인도 주말에만 가끔씩 머물렀을까? 난 단열 작업에 얼마의 비용이 들지 잠시 생각했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아까 지나온 너른 잔디밭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푸른 어떤 것도.
"저기...... 설마 바다인가요?"
난 너무 의외의 것을 보아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물었다. 그녀는 내 말투에 서려 있는 놀라움을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담담하고 차분했다.
"네...... 바다에요......"
남쪽으로 바다가 보이는 집. 경남 고성군 하일면, 2019.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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