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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의 관리와 목적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9. 4. 11.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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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십 년 전, 난 내가 아끼는 책을 구입하는 즉시 책 겉면에 투명한 비닐을 씌우곤 했다. 머지 않아 귀찮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한 번 든 버릇을 고치기란 쉽지 않았다. 도통 떨어질 것 같지 않던 그 습관은 이제 사라져 옛일이 되었다. 그래도 책에 아무런 자국을 남기지 않으려는 경향은 여전하다. 난 내 책에 낙서는 물론 밑줄 하나 긋지 않는다. 심지어 책장을 꾹 눌러 넘기지도 않는다. 책장을 침을 발라 넘기는 행위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여담인데, 요즘도 책장을 넘길 때 손가락에 침을 바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랐다. 손가락이 건조해서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꼭 침을 바를 이유는 없으니, 책장을 넘길 때 손가락으로 책장의 면이 아니라 날 부분을 잡으면 손가락이 건조하더라도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있다. 움베르토 에코는 그의 추리소설 <장미의 이름>에 수도사들이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책장을 넘기다가 독살되는 장면을 넣었다. 범인이 수도사들의 책 읽는 습관을 파악하여 책장에 독을 발라 두었던 것이다. 저 수도사들이 책장의 면이 아니라 날을 살며시 부여 잡아 넘겼더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 분실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책을 조심스럽게 관리한 덕분에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은 세월의 흔적을 빼면 마치 단 한 번도 읽지 않은 것 같은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교과서나 영어 학습서처럼 암기와 풀이를 목적으로 하는 책들은 예외다. 아내도 내 취향에 동의해 주어 책을 깔끔하게 보려고 노력한다. 언젠가 아내가 오르한 파묵의 장편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을 비닐에 싸 두었길래 왜 저리 해두었으냐 물었다. 그러자 아내는 오빠가 아끼는 책이라 조심해서 보느라 그리 해둔 것이라 했다. 아, 나도 저 정도로 신경을 쓰지는 않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어쨌거나 고마운 일이었다.


내 어머니는 책은 도구이니 겉모습이 아니라 내용이 중요한 것이라 강조하셨고, 그래서 책을 함부로 다루는 것을 개의치 않아 하셨다. 내용이 중요하다는 말씀은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책을 소중히 다루지 않으면 다른 이들도 내 책을 소중히 다루지 않을 것이고 더 나아가 타인의 책도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니, 찢어진 데다가 낙서와 국물로 더럽혀진 책에 소중한 내용이 담겨 있으리라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공공도서관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가 바로 내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함부로 사용하여 너무 이른 시기에 낡아빠져버린 책들의 상태다. 난 공공도서관의 책을 빌려 볼 때마다 책의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성숙하지 않은 시민의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2.

아내는 책을 깨끗이 관리하고자 하는 내 버릇을 존중해 주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한번은 이렇게 책을 많이 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내게 물은 적이 있다. 시간이 흘러 아이가 성장하면 읽어보라고 권해줄 수 있지 않겠느냐 했더니 아내는 아이라고 오래된 책을 읽고 싶겠냐며 핀잔했다. 이런 책을 읽을 만한 나이가 되면 종이가 누렇게 변색되고 먼지도 쌓여 있을 텐데 아이도 새 책으로 보고 싶지 오래된 책으로 읽고 싶지는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거기에 뒷말을 남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난 책장이 책으로 가득했던 이모님의 책장이 내게 어떤 호기심과 동경으로 다가왔는지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난 내가 10벌의 옷을 사서 옷장에 두는 것보다는 그 비용으로 100권의 책을 사서 책장에 넣어두는 것이 어느 면에서나 이로울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책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를 포함한 모든 것에서 그것이 당장 쓸모가 없어 보이면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그런 후회스러운 사례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아내의 염려는 타당하다. 하지만 부정적인 사례가 나머지 전부를 대체하도록 놔둬서도 안 되는 일이다.


난 학창 시절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곤 했다. 책을 추천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어서 그 사람의 성향과 상황을 알기 전엔 뻔한 베스트셀러나 고전 명작을 추천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나는 추천서를 고르는 마음으로 책을 구입한다. 내가 서재에 마련한 이 책들은 내 아이를 위한, 때로는 아내가 읽기를 바라는 거대한 추천서들인 셈이다. 제한된 시간에 너무나도 다양하게 할 것들이 많아진 세상이라 읽을 가치가 있는 책들마저 쉽게 절판되어 잊히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니, 내 아이가 장성한 뒤에는 시중에서 구하려야 구할 수 없는 책들이 여기 남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절판되고 잊혀진 책들의 목록에서 아이는 내가 바라고 궁금해 했던 세상이 어떤 세상이었는지를 읽어낼지도 모른다. 때론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어느날 아이가 잊혀진 책들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을 때 이 책장의 책들이ㅡ비록 먼지가 쌓이고 누렇게 변색되었다 하더라도ㅡ그의 내면에서 가치 있게 빛나기를 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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