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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용 <나의 인생, 나의 학문>, 주석을 달다 (3), 그리고 데이트 비용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9. 3. 10.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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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밖에서 침 잘 뱉기에는 우리나라만한 곳이 없다. (...) 버스 속에서 침을 뱉고는 발로 썩썩 비비는 B급 전범부터 식당에서 남이 밥 먹는 앞에서 '카악 카~악' 소리내는 A급 전범까지 그 수효는 굉장히 많다. 이런 A급범은 기운이 있으면 따귀라도 한 대 갈기고 싶지만 그런 힘은 없는지라 식욕이 한 번에 달아난 분풀이를 내던지는 숟가락에 하고 나와 버리곤 한다."


"우리나라에는 존댓말 많기도 유명하지만 '해라' 말이 성행되는 것도 유례가 없으며 나이가 아래거나 특정한 직업인에 대해서는 덮어 놓고 해라 하는 수가 많다. 식당에 가서는 으레 해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특히 중국집에 가서는 까닭없이 기고만장하다. 식당 종업원들은 음식을 날라다 주는 식모나 하인격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고, (...) 직업에 고하가 있을 리 없고 아무리 연소자라도 좋은 말로 대해 주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이 될 뿐 아니라 연소자들에 대한 일종의 사회교육이 될 것이다."


ㅡ 교양과 관련된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데, 읽어 보면 예나 지금이나 '버르장머리'가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크게 바뀐 게 없는 듯하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침을 뱉거나 신문을 활짝 펼치는 사람은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커다란 백팩을 뒤로 메거나 크게 통화를 한다는 식의 새로운 '버르장머리'가 연이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바뀌지 않는 것은 존대말과 반말의 시비일 것으로, 이 시비가 언제쯤 사라질 것인가 하는 것은 김원용 선생이 '직업에 고하가 있을 리 없다'라고 했던 아름다운 가정처럼 그 성취가 요원하다. 



14.

"우리들의 생활 합리화, 근대화를 근본적으로 가로막는 악습의 하나에 남의 것 내가 치르는 한국식 지불 방법이 있다. 아침 버스 속에서 친구를 만나도 그렇고, 점심 때 우연히 자리를 같이 해도 그렇고, 대금은 으레 한 사람이 도맡아 내게 마련이다. 호주머니에 두 사람분 낼 돈이 있건 말건, 또 돈을 낼 생각이 있건 없건 손으로 돈을 끄집어 내는 시늉을 해야만 신사이고, 그것을 두 손으로 가로막아 "왜 이러시오"를 연발하면서 돈을 진짜로 내놓는 것이 한국적 신사가 되는 것이다."


ㅡ 김원용 선생이 언급한 악습 중 어느 것은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고 어느 것은 과거의 인습이 되어 사라졌다. 돈의 지불 방식이 일으키는 문제는 여전한데, 요즘은 남녀의 데이트 비용 지불 문제가 사회 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그런데 남녀의 데이트 비용 지불 문제는 '누가 식사비를 지불할 것인가'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국지적 요소에 불과하다. '누가 식사비를 치를 것인가' 하는 지불의 문제는 젊은 남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라서, 우리가 동경하는 서양에도 그런 식의 '내주는' 문화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서양의 일부 국가에서도 타인의 식사비 계산을 매너로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처럼 외국도 그 매너가 올바른 것인지를 따지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서 남녀의 데이트 비용 논란을 두고 형편없는 '한국' 남자, 혹은 '한국' 여자 식으로 구분 지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외국은 서로 식사값을 지불하겠다며 계산대 앞에서 촌극을 펼치는 일이 수시로 벌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누가 데이트 비용을 지불해야 할까?'에 관한 해외 설문 결과. www.creditdonkey.com, 2014년



집단의 연장자, 상급자 혹은 접대자가 유지해야 한다고 믿는 '체면'의 위력은 생각보다 강하다. 그래서 여전히 '한 사람이 도맡아 내기'는 지속되고 있고, 그래서 앞으로도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남녀의 데이트 비용 문제가 다른 집단과는 달리 '평등'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 둘의 관계가 '완전히 동등한' 관계라는 합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트 중인 두 대상이 완전히 동일한 입장이라면 한쪽이 다른 쪽의 비용을 내줘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 '완전히 동일한 관계'라는 이상적인 합의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따지기 시작하면 나이가 누가 더 많다거나, 혹은 누가 더 취직을 일찍해서 경제적으로 여유롭다거나, 혹은 부모님에게 받은 유산이 넉넉하다거나, 혹은 취직은 늦었지만 연봉이 더 높다거나 하는 식으로 '평등의 상대적 무게'를 저울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이상적인 합의는 매 식사 때마다 동일한 비용을 지불하기보다는 '이번엔 내가, 다음번엔 네가'라는 또 다른 '내어주기' 방식으로 변용될 가능성이 높다.


김원용 선생의 일화처럼 계산대 앞에서 지갑으로 자신의 무용을 자랑하는 일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든 식사 때마다 1/N로 값을 지불하는 풍속이 자리잡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체면도 문제이지만, 때로는ㅡ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이치 때문이 아니라ㅡ진심으로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카드가 일상화되고 현금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각자 식사값을 지불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15.

"아침에 출근하고도 주렁주렁 줄을 지어 다방으로 들어가고, 점심 때 50원짜리 짜장면 먹고 나서도 35원, 40원짜리 차 한 잔을 마셔야 한다. (...) 그 안엘 들어가면 보리 한 되 값되는 '커피'를 꿀꺽꿀꺽 마시는 얼간이들이 얼마든지 있다."


ㅡ 요즘도 커피값이 밥값과 비슷하다며 혀를 차는 분위기가 있지만 그것이 이 시대의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나 보다. 1968년에도 비슷한 시각이 있었다.



16.

"나 자신은 사실은 무척 소심한 자로서 친구와 술 마시다가도 자리가 끝날 무렵에는 술값 피하는가 오해할까 봐 변소도 못 사고 앉아 있는 정도인데, 그러면서도 돌이켜보면 오해도 많이 당했고 내가 생각해도 상대가 오해하는 것이 당연하였다고 느껴지는 일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경험에 의하면 그런 오해들은 변명 않고 세월에 맡겨 저쪽에서 스스로 풀리게 내버려 두는 것이 현명지책이었고, 그래서 한때 틀렸던 사람들도 다시 되돌아오곤 한다. 성실하게 자기 됨됨이 그대로 살고 있으면 그 이상의 변명이 필요 없는 것이다."


ㅡ 오해가 생겼을 때 변명하지 않고 세월에 맡겨 저절로 풀리게 한다는 선생의 방식은 나의 오래 전 성향과 비슷한 면이 있다. 나 역시 누군가 내 행동을 오해하는 것 같아도 굳이 나서서 변명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잘한 일이 아닌 것 같다. 누군가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으면 그 느낌이 맞는지 물어보고 해명할 게 있으면 해명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지금에야 든다. 묻지 않으면 오해가 풀렸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도 없거니와, 사람들은 의외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어서 한 번 오해가 생기면 그걸 그대로 둘 뿐, 애써 풀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런 행동도 가까운 사람들에 한하는 것으로, 나와 큰 관련이 없거나 데면데면한 사이에는 구차하게 나를 설명하거나 이해시키려 하지 않는다. 오해와 변명이 싫다면 애초에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17.

"나는 부산을 몹시 좋아한다. 부산에는 언제나 바다의 향기가 있고, 현해탄을 앞에 두는 이국적인 정서가 있다."


ㅡ 저자는 부산 앞바다를 현해탄[玄海灘]이라 불렀지만 지리적으로 현해탄은 부산 앞바다가 아니다. 저자만의 실수는 아니다. 당시엔 우리나라 동남부 해안과 일본 규슈 사이의 해협을 대개 현해탄이라 불렀다. 하지만 우리나라 발음으로 현해탄, 일본 발음으로 '겐카이나다'에 해당하는 곳은 일본 쓰시마 섬의 남부에 해당하는 해역이라 부산 앞바다와는 관련이 없다. 따라서 위 인용문은 "부산에는 (...) 대한해협을 앞에 두는 이국적인 정서가 있다"라고 고쳐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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