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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와 암 ㅡ 산모를 위한 음료 만들기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9. 3. 2.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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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트의 야채 코너를 어슬렁거리다가 할인 매대에 올려져 있던 비트[각주:1] 하나를 발견했다. 비트는 보통 늦가을 무렵에 마트 매대로 올라오는데 이제 곧 봄이라 팔리지 않은 물량이 할인가로 나온 듯했다. 비트는 보관이 용이한 편이라 2월 말이었지만 여전히 싱싱해 보였다. 비트는 삶은 뒤 냉동하면 더 오래 보관할 수 있으니 할인가에 나온 것이라 해도 나쁘지 않다. 일본 작가 다마무라 도요오는 그의 책 <세계야채여행기>에 할인가로 나오는 비트를 일부러 기다린다고 적기도 했다. 할인가로 나오면 그때 대량 구매를 한다는 것이었다. 일부러 기다린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 셈이다.


지난 해엔 비트를 살짝 삶은 뒤 깍뚝 썰어 샐러드를 만들었고 남은 비트로는 드레싱을 준비했다. 이번엔 무얼 만들면 좋을까 고민하며 비트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2.

본래 비트는 북아프리카와 남부 유럽의 따뜻한 지역에서 자생하던 원뿌리 식물이었다. 그러던 것이 고대 로마 시대에 북쪽 지방으로 전래되면서 한랭한 기후에 적응하게 되었다. 지금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북유럽 등지에서 만든 비트 요리가 유명해지면서 추운 지역에서 온 야채라는 인식이 퍼지게 되었다. 


러시아의 국민 음식이자 전통 요리인 보르시(borscht)는 빨간 국물로 유명한 수프인데 이것 역시 비트를 넣어 만든다. 보르시의 색상이 빨간 것은ㅡ토마토의 영향도 무시할 순 없지만ㅡ비트 때문이다. 리투아니아의 살티바르시아이(Šaltibarščiai)도 비트를 넣어 만든 전통 요리인데 이것은 분홍빛을 띤다. 비트에 우유를 섞었기 때문이다. 



3.

비트의 붉은 빛을 내는 베타닌(betanin) 색소[각주:2]는 워낙 강렬해서 도마나 손가락에 한 번 물들면 쉽게 빠지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 사과 스무디에 섞어 넣으면 사과의 변색마저 가려준다. 더 달콤해지는 맛과 토마토의 8배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는 항산화 작용은 보너스다. 


고혈압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비트의 질산염 덕분이다. 비트의 질산염은 신체의 혈관을 확장시켜 혈압을 낮춰주는 효과가 있다.


게다가 비트의 베타닌 색소는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사우스플로리다 대학 연구팀이 2018 국제 화학 학술 회의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비트의 베타닌 색소는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진행시키는 것으로 의심받고 있는 구리 결합 베타-아밀로이드 혼합물의 산화를 90% 가량 줄이는 것으로 나타났다.[각주:3] 비트 내 질산염의 혈관 확장 기능도 뇌의 혈류량을 개선시켜 치매 예방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비트가 산모에게 좋은 이유는 빈혈 개선에도 탁월하기 때문이다. 이는ㅡ철분이 아니라ㅡ적혈구의 산소 공급 능력 활성화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비트는 산모는 물론, 폐기종에 걸린 환자뿐만 아니라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에 차는 노인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다(자세한 사항은 nutritionfacts.org의 oxygenating blood with nitrate-rich Vegetables 영상 참고). 



4.

앞서 비트에 질산염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체내에서 발암물질인 니트로사민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걱정되는 독자가 있을 수 있겠다. 질산염이 체내에서 아질산염으로 바뀌면 단백질과 결합하여 발암물질인 니트로사민화합물이 될 수 있다. 가공육 제품ㅡ소시지, 햄, 어묵 등ㅡ의 성분표를 살펴보면 아질산염이 적혀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아질산염은 현재 발암물질로 구분되어 사용량이 '제한'되어 있다. 사용 '금지'가 아니다. 건강을 위한다면 가공육 섭취를 줄이라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다만 현대 의학계는 야채의 질산염을 큰 문젯거리로 생각하지는 않는 듯하다. 일반적으로 채소는 많은 양의 질산염을 함유하고 있는데ㅡ시금치, 당근, 청경채, 양상추, 쑥갓, 케일[각주:4] 등ㅡ이들 채소에는 항산화물(대표적으로 아스코르빈산)이 포함되어 있어 니트로사민의 형성을 어느 정도 막아주기 때문이다. 비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각주:5] 다만 시간이 지나면 질산염이 아질산염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질산염 함유량이 높은 채소는 요리 후 바로 먹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러니 정 질산염이 걱정된다면 생으로 먹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익혀 먹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렇다고 비트를 너무 많이 섭취하면 오히려 좋지 않을 수 있으니 섭취 시 균형을 잃도록 해야 한다. 사람에 따라 소화가 잘 되지 않거나 설사가 생길 수 있다. 또한 비트에는 많은 양의 옥살산이 함유되어 있으므로 신장결석의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섭취하지 않는 것이 좋다.[각주:6]


또한 3개월 이내의 신생아는 비트처럼 질산염 함유량이 높은 채소를 섭취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질산염이 체내에서 아질산염으로 변하여 청색증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간혹 채소 내 질산염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유기농 채소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근거가 부족한 말이다. 2001년 한국소비자보호원의 보고에 따르면 유기농 채소의 질산염 함유량은 일반 채소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조금 더 높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유기농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어떤 성분의 땅에서 어떤 비료를 사용하여 키웠는지가 더 관건이라 하겠다.[각주:7]



5.

비트 1/4개와 와 당근 반쪽 , 사과 1개, 생수 200ml를 섞어 스무디를 만들었다. 일명 비당사 스무디다. 만들어 아내에게 건내주었는데 다행히 맛이 있다고 한다. 설탕 한 톨 집어넣지 않았지만 비트와 사과의 단 물질이 맛을 끌어올린 듯 했다. 예부터 몸에 좋은 것은 입에 쓰다고 했지만 알고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비트와 당근, 사과를 섞어 만든 '비당사' 스무디. 2019. 3. 1.


  1. 비트(beet)는 테이블 비트, 가든 비트, 레드 비트 등으로 불리고 있다. [본문으로]
  2. 간혹 '베타인' 색소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베타닌과 베타인은 다르다. [본문으로]
  3. Darrell Cole Cerrato & Li-June Ming, <‘Beeting’ Alzheimer’s: Inhibition of Cu2+-β-amyloid mediated oxidation and peroxidation by betanin from sugar beets.> (255th ACS National Meeting, 2018) [본문으로]
  4. 2001년 한국소비자보호원의 보고에 따르면, 국내 6개 시험 작물 중 EU의 질산염 허용 기준(당시 2,500ppm)을 초과한 작물은 3개(케일, 쑥갓, 상추)였다. 특히 케일은 5,000ppm을 넘는 것도 있어 다량 섭취 시 질산염의 위해성을 주의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문으로]
  5. E.Kolb, M.Haug, C.Janzowski, A.Vetter, G.Eisenbrand, (Food and Chemical Toxicology Volume 35, Issue 2, February 1997, Pages 219-224) [본문으로]
  6. 비트만 유독 많은 양의 옥살산을 함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당근, 시금치, 아마란스도 비트와 비슷한 양의 옥살산을 함유하고 있으며 마늘, 무, 콩 등도 옥살산을 어느 정도 함유하고 있다.신장계에 문제가 있거나 가족력이 사람은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본문으로]
  7. 유기재배 채소의 질산염 안전성 검토(한국소비자보호원 식의약안전팀, 200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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