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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용 <나의 인생, 나의 학문>, 주석을 달다 (2), 그리고 어두육미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9. 3. 3.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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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0년 전 남의 딸을 데리고 오면서 눈물을 흘리게 한 내가 아직도 혹독한 남편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은 스스로 뉘우쳐야 할 일이다. 그러나 내 깐에는 이제 나이도 사십을 넘고 마음도 많이 누그러져 전에 없던 동정심도 생겨서 잠자는 처의 주름 잡힌 얼굴이나, 일해서 굵어진 손가락을 보면 나도 같이 늙어 가기는 하나 불쌍하고 미안해서 한 번도 즐거운 맛 못 보이고 여자의 청춘을 다 보내게 한 데 대해 엎드려 사과하고 싶은 때가 많다."


"아내에게는 많은 고생을 시켰다. 생활이 가난해서 그랬고 나의 성미가 까다로워서 그랬다. 나는 거의 매년 외국엘 나갔지만 아내는 국내 여행 한 번 제대로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 늙어서 이제는 누구한테나 할머니 소리를 듣게 되었다. 누어서 잠자는 아내의 얼굴을 보면 정말 미안하고 측은할 때가 있다. 나는 순간적으로 신경질을 부리고 화를 낼 때가 있지만 그것은 그때뿐 모두 잊어 버리는데 아내는 나에 대한 뿌리 깊은 한을 지니고 있는 모양이다."


""당신은 나가서 일도 하고 연애도 하고 세계 구경도 했지만, 나는 일생 뭘 한 게 있어." / 이것이 근래 아내 입에서 이때마다 나오는 푸념이다."


ㅡ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이룬 사람들은 학자연하는 태도를 취하길 좋아하는데 저자는 자신이 성미가 고약하며 화도 잘 낸다고 썼다. 그는 바른 말하길 좋아하는, 그러니까 비판적인 성향의 사람이고 그의 아내는ㅡ물론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의 표현에 따르면ㅡ'둥글둥글' 살아가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둥글둥글한 태도도 외부를 향한 것이고, 남편인 저자에게는 그저 순종하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몸으로는 따르지만 입으로는 거침없이 불만을 발설했던 것 같다. 하기야 그렇지 않았다면 뿌리 깊은 '한'을 품은 채 어찌 살아갔겠나.


지금껏 여러 수필을 읽었는데 유명한 저자 중 아내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저자가 여성인 경우엔 남편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었다. 남편의 성격과 태도에 대해서, 그리고 남편의 그ㅡ대개는 부정적인ㅡ영향에 대해서.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드물었는데, 예외적으로 삼불 김원용 선생은 아내 얘기를 많이 적어 냈다. 김원용 선생을 유명한 저자라고 하기는 뭣하니 예외로 삼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그래서 그의 수필이 더 흥미진진하게 느껴지는 것일 테다. 



8.

"다리가 없는 불구자는 두 발 가진 사람들이 다시 없이 부러울 것이다. 그러나 두 발 가진 사람들은 그 행복을 조금도 느끼고 있지 않은 것이다. 안 느끼는 것은 고사하고 얼굴 못 생긴 것을 고통으로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굶은 사람에게는 밥 한 덩어리가 천하의 미식이겠지만, 배부른 사람에게는 맨밥 덩어리는 하나의 고통이 아닐 수 없다."


ㅡ 요즘 이런 소리를 하면 '꼰대' 소리를 듣기 딱 좋다. 아니, '꼰대'를 넘어 비난의 말을 들을 것이다. 행복이나 불행을 상대적인 조건으로 비교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시대와 처한 환경이 다른 데도 행복과 불행을 자꾸 상대적으로 비교한다면 그 의도가 오롯이 당사자의 '노력'과 '마음가짐'만을 탓하려는 데 있는 것 같아 분한 마음이 들기 쉽다. 


다만 유념해야 할 점이 한 가지 있다. 우리가 흔히 '성공했다'거나 '행복하다'고 표현하는 사람들은 위의 인용문이 의도하고자 하는 바를 실로 잘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9.

"잠 안 오는 침대에 누워서 내 일생 한 일이 무엇이었는가 생각해볼 때가 있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신라 때 낙산사 승려 조신이 꿈꾼 것 같은 한마당 환극과도 같은 인생이다."


ㅡ 저자처럼 이룬 게 많은 사람도 막상 나이 들어 돌아보면 일생 한 게 없다고 느껴지나 보다. 아마도 욕심 많고 분망했던 그의 성격 탓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녀를 키워낸 것만으로도, 혹은 아내나 남편을 만난 것만으로도 평생의 것을 이루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마는.



10.

"어쩌다 한가한 일요일이 생기면 아내와 함께 이석암으로 간다. 이석암은 광주 어느 산기슭에 있는 조그만 토담집이다. 뒤에도 앞에도 두리뭉실한 산이 있고 앞산 기슭에는 조그만 내가 흐르고 있다. 서울서 꼭 한 시간 거리인데 여기에는 아직도 시골의 자연이 있다. / 시골 길가에서 만난 초면의 농부와 인연이 생겨 이 낡은 집을 산 것이 꼭 2년 전의 일이다. 바깥채를 헐은 ㄱ자의 안채에는 안방, 건넌방, 마루, 그리고 부엌과 광이 있을 뿐이다. 건넌방 옆에는 늙은 대추나무가 서 있고, 뒷마당 장독대 옆에는 앵두나무가 서 있다. 마당 한구석 염소를 매어 두었다는 작은 은행나무도 밑동에서 잎이 다시 나오기 시작한다. (...)


여름의 이석암은 마당의 풀 뽑기가 대단했지만 뒷마당에 심은 상추와 풋고추로 점심을 먹고 앞뒤 맞뚫린 마루에 누워 있으면 훑어 가는 바람이 그만이었다. 앞산 개울에는 제법 헤엄칠 만한 깊은 곳이 있고 바위가 물 위로 솟아 있어 나는 그 자리를 대왕암 터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 개울과 마을 사이의 논들은 가을이 되면서 황금빛이 되었다. 이 조그만 산동네는 언제나 평화롭지만 올 가을은 더 화평하고 아름다웠다."


ㅡ 이 수필집을 읽으며 가장 부러웠던 대목이었다. 일생 이룬 게 없다던 건 그저 겸손, 어쩌면 거대한 야망의 다른 표현이었다.



11.

"사람이란 언제나 수평으로 거울을 보기 때문에 아직도 머리 위에 약간의 털이 남아 있는 줄 착각하거나, 대머리끼리 서로 만나도 스스로 자기 증세를 과소평가하는 버릇이어서 어쩌다 거울을 머리 위로 비쳐 보거나 텔레비전 속의 자기 머리를 보고서야 사태의 위급함을 알게 되는 법이다."


"내가 여권 신청할 때 신체 특징란에 '안경, 대머리'라고 기입해서 내면 실제 여권에는 '안경 착용'만 기입되어 있어 대머리의 고충을 동정해준 것인가 고마워하기도 하는데, 실지로는 아마 대머리라고 쓰면 어딘지 여권의 근엄성이 손상된다고 느껴서 그랬는지 모른다."


ㅡ 대머리의 고통은 당사자만이 알 수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보면 악마의 대명사인 메피스토펠레스와 학자가 서로를 대머리라 놀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대머리가 동서양을 떠나 좋은 놀림감이었던 건 분명해 보인다. 



12.

"고인은 어두육미라고 했는데 이것은 모두 찌거나 삶아서 먹을 때 이야기지 어두 어느 곳을 보아도 회를 해 먹을 만한 곳이 없다."


ㅡ 오늘날 '어두육미'라는 말은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어두', 즉 물고기 머리는 아무리 보아도 먹을 데가 없고 맛도 신통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두육미라는 말을 순전히 은유로 생각(맛이 없는 부분을 자신이 먹고자 했던 어머니의 사랑)하거나, 반어법으로 간주(가난한 시절에 맛이 없는 부위를 상대방, 특히 여성이 먹게 하기 위해서)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때론 아주 오래 전엔 물고기 머리를 별미로 생각할 정도로 지금과는 맛의 기준이 달랐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음식의 언어>의 저자인 국어학자 한성우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어두육미'가 거짓말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쓸모 없는 부위도 맛있다고 속여서 버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원용 선생의 이해는 달랐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탕, 찌개, 국, 찜을 자주 요리해 먹었는데 이런 요리에 생선의 머리와 고기의 꼬리 부위가 들어가면 맛이 훌륭해지기 때문이다. 십수 년 전만 해도 대구탕이나 꼬리곰탕은 물론, 소꼬리찜, 대구찜, 붕어찜 등의 머릿고기를 일미라며 칭찬하는 경우를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맛은 주관적인 경향이 강하고ㅡ어쨌거나 생선의 머리 부위는 상대적으로 살점이 적었고, 보기에도 썩 좋아 보이진 않았으니. 근래 들어 탕이나 찜을 해먹는 가정이 크게 줄어든 것도 어두육미의 퇴색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살펴 보면 최근에 옛 고사와 속담, 심지어 동화 내용을 지난 시대의 가난과 억압, 차별과 연결시킨 뒤 반어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것 같다. 그 해석이 사실이든 오독이든, 이것을 너무나도 빠르게 변해버린 사회가 만들어낸 우리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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