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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여성, 어설픈 조언자들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9. 4. 8. 00:18

본문

1.

선사시대의 채집수렵사회는 성별에 따른 분업이 일상화되어 있지 않았다. 여성은 채집을 위주로, 남성은 수렵을 위주로 움직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다 하여도 그 작업이 성별에 따라 온전히 분리되지는 않았었다. 채집 위주의 사회였기에 열매 수집 같은 간단한 일은 남녀가 함께 했을 테고, 사냥을 할 때에도 여성은 보조하는 식으로라도 뒤에서 도왔을 가능성이 높다. 아나톨리아 반도의 차탈회이위크 유적지나 괴베클리 테페 유적지에서 발굴되고 있는 유물들도 그런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성과와 인류학적 논거에 따르면 인류는 정주 생활, 즉 농경을 시작하면서 분업에 서서히 눈을 뜨게 되었다. 남녀의 분업이 초기 농경사회부터 시작되었는지, 아니면 중농업사회에 들어선 뒤 시작되었는지엔 이견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농업 혁명으로 인한 경작지 확장과 생산량 증가, 그에 이은 인구 폭발의 연쇄작용이 남녀의 분업을 가속화시켰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이유로ㅡ특히 여성의 임신과 출산으로ㅡ남성은 사냥과 농경지 관리 같은 외부의 일을 맡게 되었고 여성은 정착지 내부의 일, 즉 고기와 열매로 음식을 만들거나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드는 등의 일을 맡게 되었다. 육아 역시 아이가 외부의 위협에 스스로 방어할 수 있을 때까지 여성의 몫이 되었다.


이처럼 일이 분업화, 전문화되면서 국가, 사회, 지역, 성별 사이에 거대한 물물교환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 물물교환은 서서히 화폐교환 체제로 변경되어 갔다. 그런데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가족 내에서는 그런 일, 즉 화폐 교환이 발생하지 않았다. 현대의 가족을 보아도 남편와 아내 사이에 여전히 물물교환이라는 원시적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것이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명시적인 물물교환이 아닐 뿐이다. 시장에서는 사과 열 개로 가죽 옷 한 벌을 구할 수 있었지만 가족 내에서는 그런 식의 구체적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가족이 거래가 아니라 신뢰와 공생으로 유지되는 집단이라고 '믿었고', 그리하여 가족 내에서 이루어지는 거래 하나하나의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았다. 그들은 남편과 아내 중 한쪽이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언젠가 되돌려 받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가족 구성원 중 한 사람이 아프면 건강한 다른 구성원들이 아픈 그를 기꺼이 돌봐줄 거라 믿었다. 이 믿음엔 보증이 없었다. 서로에게 보증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그 보증 없는 영원한 신뢰에 '사랑'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이기로 마음먹었다.



2.

화폐가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건 그것이 어디서나 동등한 가치로 교환될 수 있다고 우리가 믿기 때문이다. 고대의 시민들도 그들이 따르는 왕의 권력과 진실성을 신뢰하는 한 왕이 만든 주화의 가치를 신뢰했다. 고대 로마 제국에 동화되기를 거부했던, 이른바 야만인이라 불렸던 이방인들이 로마의 데나리우스 주화를 인정했던 이유는 그들 역시 주화에 새겨져 있는 로마 황제의 이름과 얼굴이 화폐의 권력과 진실성을 보증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노동이나 사랑의 교환 역시 그것이 매우 오랫동안 일정한 가치를 유지할 거라는 신뢰가 있었기에 성립될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는 사랑이란 이상향에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서로에게 당장의 동등한 평가와 대우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언젠가, 적어도 약소하게나마 보답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접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런 신뢰가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다. 신성한 약속이므로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 전까지는 불가해소하다는 혼인의 서약이 무너지더니 이제 이혼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우리는 자신이 베푼 사랑을 보답 받기도 전에 완전히 '남남'이 될 수 있었다. 간통 역시 개인의 문제로 국한되어 이제 상대방이 나에게 지속적인 사랑을 보내주거나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게 도와줄 거라고는 믿기 어렵게 되었다. 이런 세태였으므로 결혼을 꺼리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보증 없는 신뢰가 무너져 낭만보다 현실을 따지게 되었으니, 급진적인 어떤 이들은 결혼 문화를 자유로운 성매매와 유전자 보존이라는 본능의 교환 관계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3.

이혼률, 독신 가구의 증가로 상징되는 가족 사회의 붕괴는 여성의 인권 신장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 여성들은 여성의 인권 향상과 사회 진출이 활발해졌음에도 남성이 여성을 여전히 성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억압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일부 남성들은 여성들이 사회문화적으로 보호 받았던 혹은 누렸던 혜택을 무시한 채 남성의 생산수단 장악이라는 사적유물론으로 남성을 비난한다고 생각한다. 정도와 인과에 차이가 있겠지만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가족 해체를 여권의 작용과 분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성별의 대립은 대결 구도가 단순한 데 비해 연관된 요소들이 많아 무엇이 원인이라고 단정짓기가 매우 어렵다. 여성의 생산 수단 점유, 기술 발달로 인한 육체 노동의 가치 저하, 생존에서 문화로의 삶의 가치 전이 등 많은 요소들이 얽혀 있다. 그런데 이 많은 요소들이 결과적으로 향하고 있는 하나의 요소가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대가와 교환의 문제다. 농경사회의 분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남성은 생산활동과 근력을 이용해 여성의 생존을 도왔고 여성은 남성이 밖으로 나간 사이 집안일과 육아에 힘썼다. 또한 남녀 각각은 그런 독자적인 분업 활동이 필수불가결하며 서로에게 교환 가치가 충분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평화가 지속되고 치안이 발달하여 육체를 보호하는 데 근력을 쓸 일이 상당히 줄어든 데다가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고 복지가 발달하면서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에 남성에게 손을 벌릴 필요가 점차 없어지게 되었다. 가정에서 분업의 역할 구분은 모호해졌다. 그리하여 여성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정당한 교환 가치로 인정 받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그렇게 되었으니 남성들도 생산활동과 보호에 만족하지 말고 여성들이 바라는 그 이외의 활동을 내놓아야 했다. 하지만 남성들은 여성들이 바라는 교환 항목의 제시가 모욕적이라 느꼈다. 그래서 만일 여성들이, 혹은 미래의 아내가 합리성을 근거로 가족에게 대가를 바란다면 자신들 역시 가족을 위해, 특히 미래의 아내를 위해 자신의 인생과 돈을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4.

물물교환에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완벽한 거래라는 게 존재하기가 매우 어렵다. 물물교환은 필요와 만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과 열 개가 가죽 옷 한 벌과 교환될 때 이것이 5대 5의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곳엔 적절한 필요에 따른 만족할 만한 수요가 있을 뿐이다. 시대를 가늠하기 어려운 아주 오래 전엔 이런 문제를 정량적으로 따지지 않았다. 당장 손해 같아 보여도, 혹은 당장 이익 같아 보여도 여러 복합적 관계 속에 그것을 놓아두었다. 


논란 자체를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논란은 관계를 수평적으로 지향하려 할 때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평화는 권력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거나 한쪽이 그 상황에 만족할 때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남녀엔 분명한 차이가 있고 완벽한 균형은 불가능하며 그래서 이 논쟁은 소모적으로 흐를 때가 많다. 실제로 많은 현대 여성학 저자들은 근래의 여성을 일방적인 희생자로, 남성을 둔감한 가해자로 묘사하기 바빴으며 그 사실을 널리 알리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굴기도 했다. 모성이라는 단어가 억압의 상징으로 '발견'된 것도 근래의 일이다. 그들은 모성이란 단어에서 억압을 발견한 뒤 그를 해체하며 즐거워했을 뿐,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숭고한 인간미의 훼손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그동안 소외되고 무시되었던 부성을 강조하기보단 모성을 불온한 것으로 묘사했고, 남성들에게 비폭력의 숭고함을 알려주기보다는 여성들도 주먹을 내지르도록 했다. 이런 방식은 성공적이었는가? 일찍이 모성과 여성성을 해체시킨 이들이 오늘날 무엇을 일궈냈는지 의문스럽다.


지금도 여성 전문가를 자처하는 일부 인사들은 여성들에게 더 요구하라 이르고 절대 물러서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관계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해 준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우리가 당장의 보증과 담보와 보상을 남편과 아내에게, 다른 성별에게, 심지어 아이에게 끊임없이 요구하는 한 이 기울기의 문제는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스스로 먼저 반복의 쇠사슬을 끊지 않는다면 그 '어쩔 수 없는' 현실의 고리는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에게 그대로 전이될 수밖에 없다. 상대의 이기심을 생각해 보지 않는다면 나의 이기심 역시 결코 이해될 수 없으나, 이 조언자들은 남성들에게 여성들도 이기적이고 싶은 존재라는 걸 인식시키려 노력하는 대신 여성들에게 희생과 헌신은 무가치한 것이며 당신들을 교묘하게 억압하는 것이니 폐기처분하라 충고했다. 


가족의 한 구성원에게 일방적인 헌신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런 요구는 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거부되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그를 이유로 헌신을 무가치하다거나 억압의 도구라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조언자들, 흔히 급진적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이들은 이 둘을 똑같은 것으로 대우했다. 간디는 영국을 향해 "우리에게 무기를 돌려주면 우리가 무기의 사용 여부를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무기가 없는 자는 비폭력을 주장할 수 없는 처지라는 걸 인식했기 때문이다. 여성들에게 '당신들에게도 주먹이 있다'고 알려주는 것은 그들에게 무기를 돌려주는 일이다. 그러나 '그 주먹을 내질러야 한다'고 조언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럼에도 이 조언자들은 이 둘을 똑같은 것으로 간주했다. 이들은 여성이 교육받았던 숭고한 정신을 남성들에게 가르치는 대신, 폭력과 경쟁에 기반한 남성들의 방식을 여성들이 따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식의 해체주의적 조언이 사회 전반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런 조언에는 자기 반성과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없다. 그리하여 오늘도 우리는 학창시절 자신에게 공부를 강요했던 부모를 원망하면서도 자신의 아이에게 공부를 하라 강요하고, 신혼집을 구입할 때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집안일에 간섭하는 상대 부모를 원망하면서도 자신이 돈을 낸 고객이라는 이유로 직원에게 갑질을 하며, 나의 운전 중 과속에는 그럴 듯한 이유를 덧붙이면서도 과속하는 상대를 보면 상스러운 욕설을 날리고 만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어떤 이상한 점도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당당해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난 쉽게 당하지 않아, 이제 날 희생시키지 않을 거야!ㅡ이것은 우리가 쉽게 깨닫지 못하는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그런데 때로 그 자화상이 거울에 비쳐 우리에게 드러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 보려 하는 순간ㅡ우리의 어설픈 조언자들이 나타나 거울이 구부러진 것이니 그것을 깨버리라 속삭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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