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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풍경과 추억 (3) - 거실과 마루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9. 4. 18.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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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의 거실 역시 큰 변화를 겪었다. 우선 '거실'이라는 용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실은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한국전쟁의 피해로 주택보급률이 현저하게 떨어지게 되자 정부는 전국에 공영주택을 대량으로 보급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만 해도 지금 우리가 거실이라 부르는 곳을 사람들은 '마루'라 불렀다. 


본디 마루는 널빤지를 깐 바닥 공간을 의미했다. 즉 마루는 공간이 아니라 자재의 개념에 가까웠다. 한옥의 대청은 나무로 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 바닥을 대청마루라 불렀다. 누마루나 쪽마루도 같은 이유로 마루라는 이름이 붙었다. 조선시대의 대청마루는 바깥 공간과 그대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 공간이 아파트로 넘어오게 되면서 벽으로 막히게, 다시 말해 실내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의 마루는ㅡ특히 오래된 단독주택에서 그런 구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ㅡ안방보다 작았으며 가로로 길쭉한 형태를 취했다. 대청에 외벽을 세운 곳, 그곳이 곧 아파트의 마루였다.


아파트의 거실을 마루라고 칭하던 시절엔 부엌과 안방(부부침실)이 문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마루는 부엌과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이름은 아파트였지만 구조는 과거의 한옥과 매우 유사했다. 마루가 거실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기 시작한 건 부엌과 마루가 하나의 공간으로 연결되기 시작할 때쯤으로, 이 시기는 방에 반상을 두고 식사를 하던 좌식 생활이 부엌의 식탁이라는 입식 생활로 옮겨가던 시기와도 비슷했다. 


점차 마루는 한옥의 대청처럼 잠깐 쉬거나 거쳐가는 통로가 아니라 가족이 머무르는 공간이 되어갔다. 그래서 이름도 '거처하는 공간', 거실[居室]이 되었다. 


자재의 변화도 마루라는 용어가 사라지는 데 일조했다. 한옥 시절, 대청마루나 툇마루처럼 '마루'라 칭하던 곳은 바닥이 나무로 되어 있어 온돌 같은 난방 방식을 취할 할 수 없었다. 사실 한옥에서 마루라 부르는 공간은 모두 실외에 있어 난방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아파트의 마루는 한옥과는 달리 실외가 아니라 실내였으며, 당시 마루와 함께 실내로 들어오게 된 발코니ㅡ우리 대부분이 베란다로 혼동하는 공간ㅡ와는 달리 맨발 생활을 하는 곳이었으므로 바닥 난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거실 바닥은 나무가 아닌 콘크리트로 채워졌고 그 위쪽엔 비닐장판이나 기름을 먹인 종이가 깔리게 되었다. 이처럼 나무 바닥이 사라진 공간을 계속 마루라고 부르기는 어려웠으니, 이제 아파트에서 마루라는 용어가 없어지는 건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그런데 건축 기술의 발달이 꺼져가던 마루를 되살려냈다. 온돌 대신에 콘크리트 바닥 안쪽에 온수 파이프 패널을 깔아 바닥을 데우는 보일러가 개발되더니 이윽고 두께가 얇으면서도 습기와 뒤틀림에 강한 원목 바닥재가 수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콘크리트 바닥 위에 나무를 깔 수 있게 되자 마루라는 용어가 되살아났다. 강화마루, 강마루, 온돌마루 등의 용어가 이를 드러낸다. 모노륨 장판이라 해도 이제 무늬는 꼭 널빤지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아파트라는 철근콘크리트의 딱딱한 세계는 마루라는 오래 전의 이름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거실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모이는 대화의 공간이자 놀이의 공간이 되었다. 서울, 2018.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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