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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쓰는가?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열린책들 2005)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3. 1. 12.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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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 커버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이 얇은 산문집은 내게 이런 생각이 다시금 떠오르게 만들었다. 특정 사람들―아마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작가들이 왜 글을 쓰는지 궁금해하는데, 그런 사실을 출판회사 역시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짧은 산문집에서도 아주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소설을 쓰게 된 그 계기에 관한 글을 굳이 이 책의 제목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책의 제목을 "살만 루슈디를 위한 기도"라거나 "'뉴욕'지의 질의에 대한 답변"이라고 했다면 이 책은 자신의 존재를 보다 널리 알리는 것이 목적인 본인의 사명을 어느 정도 저버리게 되었을 것이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상당히' 저버리게 되었을 것이지만, 그는 어쨌든 폴 오스터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폴 오스터란 이름과 '왜 쓰는가'란 자극적 제목으로 자신의 얼굴과 몸을 치장한 채 서점의 한쪽 책장에 올라 다리를 꼬고 앉은 뒤 독자들을 향해 유혹의 윙크를 보내는 것만 같은 이 책의 몸짓은 어딘가 불편하기만 하다. '이봐, 거기! 나 폴 오스터가 쓴 책이야. 이 사람이 왜 쓰는지 궁금하지 않아? 유후!' 왜 쓰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그 중요한 문제는 (비단 이 책의 문제만은 아니지만) 시선 끌기용 제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은 '왜 쓰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실제적 대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왜 쓰는가? 이 물음은 감수성으로 가득 차있으며 그렇기에 대답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마치 환영에라도 빠진 것처럼, 내용과 관계없이 이 책에 무조건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이유이다.

그러나 어쨌든 폴 오스터이다. 짧고, 평범한 산문들(심지어 이 얇은 하드커버 책에 연설문들마저 포함되어 있다)이지만, 그의 이름의 그 글들에 어떤 오라를 부여하고 있음을―그게 비록 마음의 착각에 불과할지라도―부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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