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오는 어느 저녁의 도로 위, 아내는 뒷좌석에 앉아 아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저기 별님이 있네, 저기 달님도 있어. 난 문득 아내에게 별과 달를 부를 때 뒤에 님 자를 붙이는 이유를 물었다. 다른 단어엔 님 자를 안 붙이잖아, 자동차님, 구름님, 공기님, 이렇게 부르지는 않지, 그런데 유독 별하고 달, 그리고 태양에는 님 자를 붙인단 말이야. 아내는 아무말 없이 듣고 있었고 난 말을 이었다. 그건 토착신앙이 남아 있는 전래동화의 영향 아닐까 싶어, 우리나라에서 전래동화가 만들어질 시기에 태양과 달과 별은 민간 신앙의 대상이었으니까, 태양은 핵융합이 일어나는 불덩어리고 달은 회색빛 모래로 덮여 있는 커다란 화성암질 덩어리일 뿐인데 아이들의 책에선 여전히 의인화된 채 존중의 대상이 되고 있지. 난 조금 뜸을 들이다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이들이 싫어하겠지. "아이들이 싫어할 거 같아."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아내가 그리 답했다.
사실 별을 별님이 아니라 그냥 별이라 부르는 사람은 별을 거의 쳐다보지 않는다. 우리가 별이나 달을 바라보며 기뻐하던 시기는 대개 우리가 별과 달을 별님과 달님이라 불렀던 시기, 즉 유년기로 한정되어 있다.
수시로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보지만 별님이 아니라 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일부 있기는 하다. 바로 아마추어 관측자들과 천문학자들. 그런데 이들이 별을 별님이라 부르던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천문학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순수는 신앙의 대상에서 과학적 진실로의 이행이라는 고난을 거쳐야 했지만 이 고난은 태양이 불타는 돌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가 불경죄로 고발된 뒤 아테네에서 추방당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낙사고라스에 비하면 별것 아니니 충분히 감수할 만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때가 되면, 성장이라는 이름의 일환으로, 더 이상 별을 별님이라 부르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일까? 순수한 꿈을 지니고 있는 사람만이 달을 달님이라, 별을 별님이라 부른다. 난 내가 그런 꿈을 꾸고 있던 시절에 달과 별을 보면서 어떤 신비를 경험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 내 아이가 달님을 부르고 가리킬 때 어떤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이가 별에 님을 붙여 노래할 때 겪는 높임의 대상화는 신앙과 같은 믿음과 복종의 정서가 아니라 '아마도' 황홀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른이 되며 경이를 잃고 냉소를 얻으니 더 이상 고개를 들어 별을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우리는 별이 우리 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별을 바라보며 신비를 느끼지도 않게 되었다.
별은 항상 빛나고 있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그러나 모두를 위해 빛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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