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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의 맛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8. 6. 16.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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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고 있는 커피 기계에는 통상적인 에스프레소 추출기가 그렇듯 버튼 하나가 달려 있다. 그 버튼을 누르면 일정 시간 동안 커피가 나오다가 제 스스로 움직임을 멈춘다. 이른바 자동 방식이다. 그런데 그 버튼 외에 다른 장치가 하나 더 있으니, 그건 일반적인 단추가 아니라 다이얼처럼 조절이 가능한 회전식 손잡이이다. 손잡이를 돌리면 그 정도에 따라 분쇄 커피를 누르는 기계의 압력과 시간이 변화하고 그 미묘한 차이가 추출된 에스프레소의 맛에 변화를 가한다. 보통 사람이 맛의 그 미묘한 차이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우리의 혀는, 그리고 표현력은 쓰거나 달다는 이분법에 익숙해져 있으니 커피를 내리는 사람의 미세한 노력 역시 그 두 구분에 쉽게 굴복해버리고 만다. 


황현산 선생은 '귀신들 이야기'라는 수필에서 자기 고향의 옛 어른들은 소금의 맛을 구별해 낼 줄 알았다고 썼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소금은 그저 똑같이 짠맛을 내는 하얀색 가루일 것이나 신안의 고향 어른들은 짠맛의 차이를 섬세하게 구분해 낼 줄 알았다고 했다. 황현산 선생은 머지 않아 '소금 맛'은 사라져 버리고 '짠맛'만이 남게 되리라는 우울한 예언을 했다.


그렇다면 언젠가 커피 맛 역시 그저 쓴맛이라는 단어로 치환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저 어딘가에 높이 떠 있는 세계에서는 살아남을지 모르겠으나 이 지상의 세계에는 맛에 차이를 가하려는 세심한 손놀림을 모두 쓴맛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달콤한 걸 좋아하는 사람에겐 커피에 설탕을 듬뿍 넘어줄 수밖에 없으며, 짠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달걀 노른자에 소금을 과하게 뿌려줄 수밖에 없다.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고 그걸 느끼게 해주려는 노력은 인정받기 어렵다. 그 노력에 대단한 인고가 필요한 건 아니다. 에스프레소를 추출할 때 버튼을 틱 누르고 마는 것이 아니라 다이얼을 세심히 조정하는 것, 원두를 세심히 고르고 손목을 돌려가며 물을 뿌리는 것, 심지어 식재료를 열심히 씻어 다듬거나 종이컵에 인스턴트 커피를 붓고 뜨거운 물을 받은 뒤에 커피가루가 뭉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저어주는 행위도 그런 노력에 들어갈 수 있다. 반찬을 냄비째 주는 것이 아니라 예쁜 그릇에 정성스레 옮겨 담는 행위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들은 맛이 없다거나 짜다거나 맵다는, 단 한 마디의 무심한 외침으로 스러져 버린다. 결국 다음날엔 대충 골라 한 번 쓱 씻은 식재료를 조미료와 마구 버무려 만든 반찬이 식탁 위로 올라가게 될 것이다. 조미료를 뿌렸으니 그 감각이 혀를 자극할 테고, 그제야 우리는 조리사와 가정주부에게 칭찬의 말을 남긴다. 그런 식으로 또 하나의 섬세한 맛과 정성이 사라져 간다.


이런 맛과 노력, 정성이라는 가치가 사라져 가는 걸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의미 전달이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스스로 깨닫지 않고서는 알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찌보면 다양성이 아니라 편의성으로 획일화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 편의는 시장에 직접 들러 눈과 감촉으로 재료를 골라온 수고에 칭찬은커녕 인터넷으로 사면 될 걸 뭐하러 고생을 하느냐는 비난을 가하고, 에스프레소 기계의 다이얼을 돌리고 있는 손길에 그냥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 걸 왜 사서 고생하느냐는 무신경한 응징을 가한다. 


그렇게 우리의 표면은 둥글게 되어 간다. 시간이 갈수록 모가 사라지고 둥글게 된다는 건 한편으론 슬픈 일이다. 우리에게 자신만의 철학을 가진 모난 장인이 없는 이유는 주변에서 그 철학을 절대 그대로 놔두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의 세계는 여기저기 깨어지면서 차츰,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이 둥근 얼굴을 한 형상으로 변해간다. 우리는 우리를 닮은 것을 좋아한다. 신이 우리의 형상을 닮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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