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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주의자와 회의주의자라는 이분법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8. 4. 15.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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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단적이었던 나는 모든 것을 의심했지만, 내가 의심의 도사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았다.[각주:1] 

ㅡ장 폴 사르트르



1.

조선시대 나인들의 처녀성 감별법과 같은 비과학이 이미 중세 이후에 끝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투영검사법은 19세기는 물론 지금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탈리 광장을 가로지르다가 자동차 사고를 당했던 자코메티는 자신의 인생에 드디어 특별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믿었으며 방바닥을 기어가다가 문에 부딛혀 이가 부러진 사르트르 역시 그 사건을 특별한 위인들이 겪어야만 하는 일종의 고난으로 여겼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이런 낙천성은 막연하지만 그들의 인생을 추동시키는 힘이었다. 이런 그들의 행동에서 회의주의자의 특성을 발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한 인물을 맥락으로 판단하기보다는 단편적인 한 사건을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성향을 지녔으므로 실제의 그들과 우리가 보는 그들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곤 한다. 가령 누군가가 어떤 책을 읽고 비판적인 후기를 남기면 일부 사람들은 그에게 비난하길 좋아하는 비관적 인물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여러 권의 책을 구매하는 것을 보면서 그 책들을 언젠가 다 읽을 것이라 생각하는 그의 낙천성을 발견하기보다는 그의 낭비벽과 과시욕을 우선적으로, 한정적으로 발견한다. 이쯤되면 누가 진짜 비관주의자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사실로 일반 대중을 비난하기는 어렵다. 이런 함정에는 누구나 빠지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자신이 "선택된 사람들을 위해서만 마련된 시련"과 사람들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실수"를 구별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실수를 하늘의 실수로 돌리며 책임을 피했던 것이다. 자기 자신, 자신이 속한 집단에 가해지는 비판을 맹목적으로 부정하는 오늘날의 세태는 이런 현상을 더욱 가속시킨다. "요즘 애들은 말을 참 안 들어." 이 문장은 시대를 떠나 언제나 유효했다. 오늘날에는 온갖 곳에 자리하고 있는 수많은 매체 덕분에 자기중심주의가 지난 시대보다 더욱 심각하게 느껴진다. 인터넷 뉴스에 달린 댓글들을 보고 있자면 과연 이 세상에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의심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자신들만을 생각하는 편한 어법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은 비관주의자로 가득한 셈이다. 낙천주의자인 자신만 빼고. 그런데 스스로를 낙천주의자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이 비관주의자로 가득하다고 평하는 일이 잦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누군가는 평생 그걸 의식하지 못하고, 누군가는 조금씩 알아간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2.

낙천주의를 열렬히 신봉했던 단체들은 대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타락한 정권, 부패한 종교, 악덕 사업주, 옹졸한 가장. 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시민과 신도와 일꾼과 가족들에게 낙천주의를 강요해 왔다. 지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어떻게 더 낫게 만들려고 시도하지 말고 지금 당장의 현실이 주어진 것에라도 감사하며 살라고 말이다. 그렇게 계속 일하고 믿다 보면 언젠가 (심지어 죽음 이후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의심하지 말고 낙천적으로 따르라고 말이다. 낙천주의는 안타깝게도 그런 시녀 노릇에 자주 이용되어 왔으며 이것은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다. "회의주의는 대개 옳고 낙천주의는 대개 그르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대개 낙천주의였다"라는 말은 낙천주의를 옹호할 때 종종 사용되곤 한다. 이러한 이분법은 교묘하게 세상을 쪼개 회의하는 모든 것들을 부정적으로 만든다. 이들은 이른바 '부정적인 낙천주의자들'로, 비관주의자들에겐 비관적이고 낙천적인 자신들에겐 낙천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을 그들의 낙천성으로 부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떤 이들의 인생은 그런 자들과의 대결로 점철되어 있으니 사람이 성장하면서 겪는 세상의 풍파에는 항상 그 대결이 포함되어 있었다.



3.

낙천주의가 지닌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에 반하는 사고 방식, 이른바 회의주의[각주:2]가 비난받는 까닭은 그들이 쏘아 올리는 화살이 거의 항상 외부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의주의는 스스로를  많은 젊은 세대들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많은 문제가 현재의 중년에게서 비롯되었는데도 젊은 세대를 이해하지 못한 채 노력만을 요구한다며 비판한다. 수많은 여성들은 남성들이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상대적 약자인 여성들을 나 몰라한다며 비판한다. 그들의 말은 맞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오늘날의 젊은 세대 또한 현재의 중년과 노년층이 겪어야 했던 전쟁과 가난과 교육의 빈곤을 깊이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여성들 또한 상당수 남성들이 강제로 사회 속에 던져진 채 출세를 강요받으며 제삿상에 바쳐질 소처럼 살아간다는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누가 이런 말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오히려 약자가 왜 강자를 이해하려 시도해야 하는가,라는 불만의 소리가 터져나온다. 


사르트르는 자신이 평생 무신론자로 살아왔다고 믿었으며 때로 가톨릭을 공격하였으나[각주:3] 인생의 말년이 되고 나서 실은 자신이 가톨릭이라는 부식토에서 자란 잡초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글쓰기라는 자신의 운명과 사명을 강렬하게 믿었는데, 그 믿음이 실은 기독교의 구령예정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인식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아버지가 만들어 낸 토양에서 자랐고, 남성의 존재를 혐오하지만 남성의 영향을 받아 자랐으며, 여성의 비논리성을 비난하지만 어머니가 유아기때부터 부여한 감정의 폭에서 성장했다. 모든 남성적인 것들을 증오하는 태도에 실은 남성성이 드러나고 있다는 걸 우리들은 알지 못한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결국 우리는 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했던 조상들의 자손이며, 여전히 그 경계 안에서 자라고 있다. 우리는 화성의 표면에서 인간의 형상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화성인이 지구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믿었던 존재들, 자기가 속한 것들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뛰어난 현대인을 자처하는 사람 중엔 어쩌면 그런 조상들의 일화를 비웃으며 신은 아마도 꽃이나 소를 닮았을 거라 이야기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자조와 비아냥을 일삼는 이들이 타인의 이해는커녕 본인들이 속해 있는 단체들조차 제대로 대변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이미 기원전에 장자는 조릉의 숲에서 약자와 강자라는 먹이사슬의 비극을 깨달았지만 이제 우리는 선인의 말씀조차 아무렇지 않게 조롱할 수 있을 듯하다. 회의주의자는 때로 염세주의자로 보이며, 그리하여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껴안은 채 자신의 얼굴에 포악하고 심술궃은 습곡을 그려냈다.


그러니 낙천주의자와 회의주의자라는 이분법은 무의미하다. 실은 불가능하다. 어느 곳에도 그 하나의 성향을 대변하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인물이 실존한다면 그는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세계는 낙천적 회의주의자로 가득하며 우리는 그 폭넓은 공간을 그때의 기분에 따라,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자유롭게 유영해 나갈 뿐이다.



  1.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명환 옮김, <말> (민음사 2015), 268쪽 [본문으로]
  2. 회의주의는 본래 철학에서 다루고 있는 인식의 방법론 중 한 가지를 뜻하나 여기에서는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용례, 즉 이성을 바탕으로 모든 사실을 의심해보는 태도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했다. 대중이 회의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은 일반적으로 철학적 회의주의보다는 과학적 회의주의와 유사하다. [본문으로]
  3. 교황청은 사르트르의 모든 저서를 금서 목록으로 지정한 일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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