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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과 언어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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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반찬들을 골고루 먹지 않는 편이다. 마치 차례대로 나오는 코스 요리를 즐기듯이 한 가지 종류의 반찬을 어느 정도 비운 다음에야 비로소 다음 반찬에 손을 댄다. 예를 들어 식탁에 밥과 국, 김치가 있다면 김치를 먹고 밥을 다 먹은 뒤 마지막에 국물을 마시는 식이다. 내 이런 행동은 곧잘 오해를 일으켰다. 국은 전혀 뜨지 않은 채 밥과 김치만 먹고 있으면 국이 맛이 없냐는 질문이 들어왔고, 김치만 계속 먹고 있으면 내가 김치를 특별히 더 좋아하는 것으로 여겨 다 비운 반찬 그릇에 다시 김치를 수북이 올려주곤 했다. 다행히도 난 언어를 아는 성인이었기에 내가 그렇게 먹는 이유를 설명하여 오해를 풀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기존의 내 방식대로 먹기보다는 일부러 골고루 먹으려 노력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은 한 가지만 우선적으로 먹는 내 행위에서 코스 요리보다는 '편식'이라는 고약한 습관을 떠올리는 듯했으니, 난 굳이 내 습관을 유지하여 괜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특히 24개월 전후의 아이는 끙끙대다가 마지막엔 울어버리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와 같은 처지에 있던 아이라도 나와는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가령 여기에 국에 있는 건더기를 먼저 먹고 난 뒤 국물을 말끔이 마시고 싶어하는 한 아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아이는 열심히 건더기를 건져 먹었고 그 덕에 곧 국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목이 말랐던 아이는 얼른 국물을 들이키고자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아이의 부모가 나타나 국에 고기를 쏟아부어버린다.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다. "아유, 우리 아기는 고기를 참 잘 먹네, 고기가 그렇게 좋아? 더 줄 테니까 많이 먹어." 이제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고, 부모는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울음에 참 이해할 수 없는 아기라며 혀를 찬다. 


당신 말고 그런 사람이 어딨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당신 말고 그런 식으로 먹는 사람은 없을진대, 심지어 아기를 예시로 들었으니 더더욱 잘못이라고 말이다.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한데 황현산 선생이 남긴 "겨울의 개"란 제목의 수필에 비슷한 일화가 있었다. 선생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직접 겪은 일이라 하니 그제야 비로소 그것이 나만의 특이성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어린아이만 이런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어른들도 비슷한 위험에 처해 있다. 때때로, 아니 실은 자주 말은 내가 의도치 않았던 방향으로 해석되어 상대방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뜻하지 않았던 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때로는 심각하게. 이런 일이 잦아지면 이제 우리는 마치 말을 못하는 아이가 된 것처럼 입을 다물게 된다. 무릎에 얼굴을 묻은 우리 주위로 적막이 다가와 감싸안는다. 어른이 된 우리는 언어를 얻은 대가로 유년 시절의 커다란 울음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상실은 나비 효과처럼 퍼져 유년 시절의 기억을 사라지게 했고, 어린 시절 우리를 울렸던 어른들의 그 숱한 행위들을 성인이 되어 반복토록 했다.


아기가 운다. 어른이 운다. 우리는 도무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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