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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관계의 경제학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8. 2. 22. 23:49

본문

1.

맨큐와 같은 보수 경제학자의 저서를 읽다 보면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보수 경제학자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재화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으며 규제는 없으면 없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있으며 그 대가는 그것의 기회비용과 자유롭게 교환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깨끗한 환경 역시 하나의 재화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환경은 어떠한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다른 이득이 있다면 얼마든지 손실을 가할 수 있는 대상이며, 경제적 총합을 따졌을 때 환경 손실분보다 이득이 크다면 결국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라 여긴다. 이러한 견해는 최저 임금제처럼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는 사안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다른 상황에도 쉽게 적용이 가능하다. 즉 이들은 섹스, 장기, 혈액 역시 정부의 불필요한 규제로 인해 일반 주민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 대상이라 생각한다. 이미 맨큐는 자신의 대표적 저서인 <맨큐의 경제학>에서 장기 매매 시장의 필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면서 장기 매매시장은 "가난한 사람의 희생(장기판매)으로 부자들만 이득(장기구입)을" 보는 구조라는 반대편의 주장에 대해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필요하지도 않은 장기가 하나 더 있지만, 우리 국민 중 일부는 그 장기 하나가 없어 죽어야 한다면 과연 이것이 공평한 일일까?"라는 의문을 던졌다.


레오 카츠는 <법은 왜 부조리한가>에서 장기 매매의 문제를 몇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해 보았다. 보수 경제학자들의 논리에 따르자면 장기 매매는 분명 많은 국민들에게 이득이 되는 시장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그 시장을 불편해 하고 정부는 전면 금지에 나서는가?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상반된 입장을 볼 수 있다. 맨큐와 같은 경제학자들은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가 환경을 생각하는 아주 훌륭한 제도라고 칭찬하는데도, 왜 적지 않은 수의 국민들은 배출권을 거래하는 그 일에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가? 



2.

그 거부감을 이해하기 위해 레오 카츠가 <법은 왜 부조리한가>에서 제시했던 '콩 한 접시' 사건을 사례로 들 수 있다. 콩을 먹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콩을 다 먹으면 5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한 할머니의 사례는 장기 매매시장에서 느끼는 불편한 감정의 이해를 위한 좋은 실타래가 되어 준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콩을 먹이려 했지만 먹기 싫다는 아이의 투정에 한발 물러서기로 한다. 어머니는 자신이 세웠던 식단 기준까지 저버리며, 먹기 싫은 것을 먹지 않을 아이의 권리를 위해 나름 큰 양보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때 할머니가 나타나 콩을 다 먹으면 5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아이는 얼른 콩을 다 먹고 5달러를 챙긴다. 이때 어머니는 어떤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그 실망감의 정체는 우리가 장기매매나 탄소배출권 거래제가 허용될 때 느끼는 불편함과 비슷하다. 겨우 5달러에 매수되어 자신의 양보와 권리를 저버린 아이에게서 받는 실망감은 소중하다고 여긴 것들(인권, 인간의 장기, 깨끗한 환경)이 돈으로 쉽게 거래될 때 느끼게 되는 감정과 유사하다.


아하, 값을 매길 수 없이 소중하다고 여겼던 것이 돈으로, 혹은 그보다 훨씬 가치가 덜한 것으로 치환될 때 느끼는 실망감이 그 원인이었군! 그러나 이런 설명도 모든 사람들을 완전한 이해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실망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망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 돈 5달러에 '콩을 먹지 않을 권리'를 '판매'한 것이 뭐가 문제냐며 어깨를 으쓱할 사람들이. 물론 실망감을 느끼는 것과 실제 이득을 따져야 하는 것은 탄소배출권 거래의 문제처럼 별개로 생각해야 할 때가 있다. 문제는 일부의 '우리'가 느끼는 실망감조차 불필요한 감정으로 치부하는 행태이다. 미래의 언젠간 인간의 총체적 이윤을 근거로 장기매매가 합법화될 수도 있으며 또 사람의 생명을 돈으로 주고 사는 일이 과거처럼 재현될 수도 있다. 그때 사람들은 소중한 무언가가 (비록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할지라도) '거래'의 수단이 되어버렸음에 상실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중요한 건 그 감정을 이해하는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감정에서 손을 뗀 뒤 쓸데없는 잔소리를 한다고 생각해 버린다. "5달러도 벌고 콩도 먹었는데, 이만하면 훌륭한 거래 아니야? 왜 귀찮게 따지는 거지?" 만일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한 경제적 논리에만 입각한 채 상대방의 감정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 시대를 가히 '인간성 상실의 시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3.

사람들이 분노하는 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들의 감정이 배려되지 않을 때이다. 당장의 귀찮음을 이유로, 당장의 불편함을 이유로 대화 자체가 거부될 때ㅡ이런 일들은 특히 부부 사이에서 자주 일어나는데ㅡ관계에 대한 회의가 급격히 증가한다. 그러다 보니, 보수 경제학자들이 '그냥 놔두면' 모든 일을 시장이 다 알아서 해결할 거라 믿는 것처럼, 어떤 부부들은 가족간의 불화를 그저 '시간'에 맡겨버리고 만다. 자신이 수십 년 동안 지녀온 규범과 아내 혹은 남편이 수십 년간 유지해 온 규범이 수시로 충돌을 일으키는 결혼 초기의 부부들 중 일부가, 가족 사이의 문제 조정에 지친 나머지 이제 회의가 열린다는 사실만으로도 온갖 짜증을 느껴 버리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시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자 한다. 하지만 만능처럼 느껴지는 자유시장도 외부효과를 다스리기 위한 정부가 필요하듯, 모든 걸 해결해주는 듯한 시간도 결국 협상가가 필요한 법이다. 조정자 없이 마냥 문제가 풀리길 기다리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멋진 운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도박은 대개 실패로 끝난다.



4.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조와 그에 반대하는 임원진들을 떠올려 보자. 불행한 부부의 관계는 이들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이미 서로에게 잠재적인 짜증의 대상이 되어 있다. 불편한 기색으로 머리띠를 둘러맨 채 협상 테이블 반대편에 앉아 있는 노조원들의 얼굴만 보아도 혈압이 끓어오르는 임원진들의 모습처럼. 사장이 옆의 비서에게 조용히 한 마디 건넨다. "저놈들은 왜 사장 얼굴을 보고도 가만히 의자에 앉아 저렇게 똥씹은 표정들을 하고 있는 거야? 회사 사장인 날 무시하는 거야 뭐야?" 앞으로 회의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손쉽게 알 수 있다.


이때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도 있다. 노조에서 상냥한 표정과 말투로 임원진들을 맞이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회의가 결렬된 책임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임원진들을 맞아 그들의 '역린'을 건드린 노조측에도 있는 것 아니냐고. 실제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난 그들을 '철없는 이상주의자'로 부른다. 왜냐하면 본인들이 노조의 자리로 가게 되었을 때 본인들 역시 똑같은 표정과 말투를 취하게 될 것이 확실하기에. 


이제 철없는 이상주의자와 현실적 노조원들은 돈이 많은 임원진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제안을 받게 된다. "자, 그 얼굴을 풀고 미소를 지으면 모두에게 5달러씩 주도록 하지." 5달러가 충분한 균형가격이라고 생각하는 경제학과 출신의 보수적 노조원은 그 돈을 받고 미소를 지어줄 것이다. 돈도 얻고 협상 테이블에서 미소까지 띄웠으니 '윈윈'이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어떤 노조원은 그깟 돈으로 솔직한 감정 표현권을 자신에게서 사갈 수는 없을 것이라 맞설 것이며 그러한 제안 자체에 수치심마저 느낄 것이다. 임원진들은 "좋은 게 좋은 건데, 5달러에 얼굴 펴는 게 그리 어려운가" 하고 묻는다. 그들은 자신의 소중한 돈을 별것도 아닌 '표정 바꾸기'를 위해 지불할 의향이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감탄할 뿐, 자신들의 태도가 오히려 노조원들을 자극할 수 있음은 고려하지 않는다. "돈이면 다 인줄 알아!" 화가 나 고함을 치는 노조원에게 불쾌함을 느낀 임원진들은 도저히 회의를 시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며 곧장 회의실을 빠져 나가버린다. "저속한 놈들, 툭하면 고함이나 지르고 말이야. 교양이 없어, 교양이." 이만하면 이 두 그룹을 앞으로 맞물릴 가능성이 없는 평행선이라 보아도 거의 틀리지 않을 것이다. 돈을 받고 표정을 푼 노조원과 그렇지 않은 노조원 사이에서 일어날 내분은 덤으로 남아 있다.



5.

부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다양하지만 위의 논의와 비슷한 경우가 상당하다. 어느 한쪽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상대편에서는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경제학적으로 보자면 한쪽은 감히 거래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한쪽은 돈으로 충분히 거래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상황에 대입해 볼 수 있다. 해결의 실마리는 여전히 상대방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경제적 동물이기 이전에 '인간성에 기반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시 콩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5달러를 받고 먹기 싫었던 콩을 먹은 아이가 어머니의 '소중한 감정'을 이해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깝다. 하지만 어머니가 아이의 돈에 대한 욕심과 돈을 소중히 여기는 감정을 이해할 가능성은 보다 열려 있다. 보통의 어머니라면 돈을 주며 콩을 먹이려 했던 할머니를 만류할 것이고 돈을 받으며 콩을 먹는 아이를 곧장 꾸중할 것이다. 그리고 보통의 아이라면 어머니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채 화를 낼 것이다. 대다수 부부의 모습은 이들 모자의 모습을 닮아 있다. 한 가지 방안이라면 보다 이해심이 넓은 어머니가 아이의 돈에 대한 욕구를 이해해주며 시간을 두고 천천히 타이르는 것이다. 부모-자식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동등하게 여겨야 한다고 믿는 부부 관계에서는 좀처럼 성립되지 않는 일이지만 행복한 부부들은 일반적으로 상대방에게 그런 입장을 취한다. 설령 부당해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한 이해를 자신이 먼저 시작하는 것이다.



6. 

위 사례에서 어머니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다음번에 아이가 또 다시 콩을 먹으려 하지 않자 어머니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실제 있었던 일이다).


"넌 5달러을 위해 콩을 먹었지. 그러니 사랑하는 엄마를 위해서도 콩을 먹을 수 있겠지?" 


아이는 엄마보다 5달러가 더 소중하다고 말할 수 없었고 그래서 매 끼니 때마다 계속 콩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ㅡ어쩌면 의외일까?ㅡ훗날 성인이 된 아이는 엄마가 그 질문을 하는 순간 유년시절의 행복이 끝장나버렸다고 토로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계획대로 콩을 먹일 수 있었지만 예상치 못하게 아이의 행복을 깨트리고 만 것이다. 만일 독자 여러분이 당시 아이가 그러한 감정을 느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이 글을 읽은 시간이 그리 아깝게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7.

부디 아깝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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