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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결혼한다 (2)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8. 4. 13.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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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코하마에서 태어났지만 요리를 할 때면 교토 출신인 아버지의 식문화에 맞춰 "우리 집 요리는 간사이풍이라 약간 싱거워" 하고 말하곤 했다는 일본 작가 다마무라 도요오의 어머니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기본적인 식문화에서도 서로 배려하고 절충할 줄 알아야 한다는 배려심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이런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우리 집 식사는 남편에게 맞춰 빠른 편이야, 우리 집 식사는 아내 집안의 가풍에 맞춰 느긋한 편이지." 그리고 그 사이의 어떤 지점도. 그런데 그 다정한 맞춤, 양보란 대체 언제쯤 양립할 수 있는 것일까? 계속 받아주기만 하다보면 양보하는 건 항상 자신이 될 거라는 불안감이 우리를 엄습한다.


도연명은 그의 나이 51세 때 지은 <여자엄등소>라는 편지에 "조용하게 혼자 있는 것이 좋았단다. 책을 읽고 깨닫는 바가 있으면 너무 기뻐 밥 먹는 것조차 잊었단다"[각주:1]라고 쓴 일이 있다. 그런 이들은 보통 가난을 피하기 어려우니 그 역시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춥고 배고픈 생활을 피하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이때 그는 자식만을 언급했었는데 당시 그의 아내가 어떤 심정이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도연명의 아내에게 자신과 자녀들에게 닥친 가난이라는 고난을 먼 미래의 행복으로 대체하라고 권하기는 무척 어려울 것이다.


부부간의 불화를 피하려면 중국 진나라의 손등처럼 사람들이 그를 잡아다 물속에 던져넣어라도 물에서 나와 크게 웃거나 후한의 사마휘나 조선 전기의 황희처럼 모든 시비에 번번히 너도 옳다고만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 역시 실없는 인간이라는 소리를 듣거나 사마휘의 아내가 간했듯 "마땅히 분별해서 논해주어야 한다"는 핀잔을 들을 수 있다. 자기 혼자 속 편하게 산다는 비난을 피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고대의 사막 수도사였던 팜보가 그랬던 것처럼 상대방의 물음에 즉석에서 대답하지 않고,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얻기 전까지는 "아직 대답을 찾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나을까? 그는 사막에서 수도하며 평생 바구니를 짰는데 70세가 되어 숨을 거둘 때 그 바구니를 팔라디우스에게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바구니를 받아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각주:2] 우리가 수도사의 이런 경지에 달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 배우자까지? 평범한 현대인에겐 불가능한 요구이다. 그가 여럿이 아니라 혼자서 수행을 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다.


'금술우지'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비파와 거문고의 조화로운 음조처럼 부부의 사이가 좋은 것을 뜻하는 고사성어이다. 각각의 연주가 뛰어나다해도 비파와 드럼, 거문고와 피아노는 어울리기 쉽지 않으니, 부부 각각에 문제가 없다고 하여 금술이 마냥 좋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각각의 기질, 선율, 화음이 어울려야만 듣기 좋은 소리가 발현된다. 결혼을 하고나서 보니 남편은 거문고, 아내는 피아노라면? 혼자 있을 땐 그렇게 훌륭한 사람들이었는데 함께 살자 쇤베르크의 무조음이 울려 퍼진다면? 해결책 중 하나는 좋은 지휘자와 작곡가를 만나는 것이다. 그것이 실제의 현자이든 고매한 인물이든 훌륭한 책이든 간에. 그러면 조율이 이루어지고 각각의 특성을 살린 새로운 음표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을 가능성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공 확률은 여전히 높지 않다. 나는 올바르게 연주를 하고 있는데 네가 노력을 덜해서, 너의 관심이 부족해서 제대로된 연주가 되고 있지 않다는 비난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매우 어렵다. 그리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는 배우자에게 때로는 폭군의 그림자를 씌워보기도 한다. 



2.

세계 여러 곳에 결혼에 관한 속담이 많이 있는데 대개는 결혼의 어려움, 특히 여성을 상대하기 어려움을 토로하는 속담들이다. 상대적으로 남편을 비판하는 속담이 거의 없는 것은 남성들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여성들의 생각이 사회적으로 표면화될 시간이 남성들에 비해 주어지지 않았던 탓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여성을 비하하는 여러 속담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다음의 프랑스 속담이었다: "아내를 맞이함은 폭군을 섬김과 같다." 


이 속담은 어느 정도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속담을 더 그럴듯하게 고칠 필요가 있으니 곧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다: "아내 혹은 남편을 맞이함은 폭군을 섬김과 같다." 속담은 간결해야 하므로 다음처럼 고치는 게 더 낫겠다: "배우자를 맞이함은 폭군을 섬김과 같다."


결혼을 하는 세 쌍 중 한 쌍이 이혼을 한다는 국내 현실에서 위 속담이 제시해주는 바는 크다. 우리는 사실상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폭군과 결혼을 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상대를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희생을 꺼리는, 나쁘게 말해 폭군의 느낌을 주는 배우자들. 우리는 결혼을 할 때 그 사람이 훌륭할 것이라 기대를 하는데, 실상 그 훌륭함이란 자신의 이기심마저 잘 받아줄 수 있는 훌륭함이다. 하지만 '결혼 후'에도 자신의 이기심을 받아 주는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 아마도 서로의 행동을 상대방 이기심의 발로라 주장할 것이고 결국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상대방에게 서로 폭군이 되어간다.


훌륭함. 그것은 곧 폭군마저도 '섬길 수 있는' 이해심, 혹은 사랑을 뜻한다. 하지만 폭군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는 폭군을 섬기면서도 그 사람을 폭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정도의 깊이를 요구받는다. 결혼이 우리의 완성을 돕는다면 그것은 결혼이 하나의 시험대, 난관이기 때문이다. 항상 나에게 잘 대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사랑은 결코 쉽게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결혼이 우리의 완성을 돕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미 완성되어 있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폭군마저도 사랑할 수 있는 깊이를 요구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결혼한다. 그리하여 그 생활이 행복하지 않다면 시련이 우리를 완성으로 이끌 것이기에 끝까지 참아내면 결국 행복해지리라는 낙관주의에 기대야 했다. 그것이 우리의 전통과 도덕이 결혼에 부여한 행복이라는 이름의 숙명이었으며,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이 결혼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원인 중 하나였다.



3.

우리의 배우자가 저지른 잘못이 오롯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인류의 잘못이라고 했던 지난 글의 마지막 문장이 그리 맘에 들지 않을 것이다. 특히 비종교인들에게 더욱 더. 앞선 명제엔 종교적 색채가 엿보인다. 상당수의 종교인들, 즉 신념윤리자들은 어떤 사람의 행동이 잘못된 결과를 낳았다더라도 '그 의도가 순수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세상에 책임이며 신이 부여한 시련일 뿐이라고 믿는다. 신이 그러하도록 인류를 창조한 것이므로 그것을 그 사람의 온전한 잘못으로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결론은 그의 반대편에 있는 책임윤리자들에겐 언짢게 들릴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누군가 무슨 잘못을 했다면 어쨌건 그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다. 책임윤리자들은 인간이 완전하다거나 선하다는 식의 전제를 할 권한과 능력이 인간에게 없다고 본다. 따라서 누군가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만한 어떤 문제가 실제로 빚어졌다면 그는 그것에 사과하고 온전한 책임을 져야 한다.


따라서 아내는 남편의 집안 식습관에 맞춰 짜게 요리를 하기보다는 건강상의 이유로 싱겁게 요리하는 걸 선택할 것이다. 어쩌면 조금 더 오래 살겠다고 평생 싱거운 요리를 먹느니 적절히 간을 한 음식을 먹겠다는 남편과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선택을. 이들은 서로의 선택이 옳다며 싸우겠지만 백 년 전에는 음식을 맛있게 먹지 않는 것이 교양 있는 여성의 도리(적어도 서양에서는)였다는 걸 알게 된다면 자신들이 하고 있는 다툼의 무위성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탐식이 기독교 7대 죄악 중 하나라는 것에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음식을 보냈고 악마는 요리사를 보냈다는 교리에서 기이한 모호성을 깨닫고 그 불가해성 안에서 음식의 간을 가지고 서로 논쟁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인식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녹록치 않다. 우리는 도연명, 사마휘, 수도사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의 부부 생활이 실제로 행복했다는 증거도 없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결혼하지만 결혼은 신성하고 이혼은 불경하다거나 배우자, 특히 남편이 폭군 같이 굴어도 이해하고 그 고난을 완성으로 가는 과정이라 생각하라는 너무나도 어려운 과제를 부여받는다. 어렸을 때부터 배워온 그 윤리적 혹은 종교적 절대성을 부인하기란 쉽지 않다. 그 완고함은 우리를 질리게 만들고 설령 그것이 옳다 하더라도 마냥 실천하기에는 그 문이 너무나도 좁게 느껴진다. 그래서 오늘날의 현대인에겐 행복한 삶을 위한 다른 명제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다ㅡ"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결혼하지 않는다", 혹은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이혼한다"라는 새로운 명제의 도움이.



  1. 중국인물사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도연명 편. 인터넷본 [본문으로]
  2. <초대 사막수도사들의 이야기>, 팔라디우스, 5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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