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이터가 나는 듯 얼음 위를 미끄러진다
운동과 죽음이 위아래로 나뉘며
장난이란 이름으로 위협이 가해지는 그곳을
그러니 그대, 가볍게 스쳐 재빨리 지나가라
ㅡ 피에르 샤를 루아
1.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고독을 이야기한다. 온세계의 사람들과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상이지만 고독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 현대인, TV나 냉장고조차 네트워크 단말기에 연결되는 세상에 사는 이 고독한 노드(node)들은 기계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나타내는 다양한 도구들을 이용하여 아직 모르는 사람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살아간다. 이 만남은 필연적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고독은 백 년 전의 고독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 폴 사르트르는 고독 때문에 미쳐서 죽은 에밀이란 인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때의 고독을 상상해 보라. 황량한 대자연 아래서의 고독을, 한계적 상황에서 맞닥뜨린 제한된 관계의 고독을. 이 관계 범람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고독 때문에 죽는다. 하지만 그때에 비하면 조금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2.
글을 쓸 때 자료 조사를 중시했던 쥘 베른은 자신이 백과사전이 있는 세상에 태어나서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오늘날의 우리는 인터넷이 있는 세상에 태어나서 천만다행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인터넷의 내비게이터에 의지한 채 방 안에서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고독뿐만이 아니라 감각적 경험마저 해소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우리에겐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실현이 불가능한 믿음이다. 그들이 제아무리 실제와 같이 보일지라도 결국 그들은 평면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회화와 건축을 감상할 때도 그림과 건축에서 느껴지는 힘의 감각이 아니라 그림을 그린 작가, 그 작가가 속한 유파, 건축물을 설계한 건축가의 이름과 양식을 인터넷에서 찾아 외우는 데 관심을 두게 되었다. 사실 그것 외에 무엇을 획득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우린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렇듯 인체의 감각을 텍스트와 가상의 이미지로 치환하는 데 만족하게 된 우리 여행자들은 네트워크 내부에서 보았던 복사본과 실제의 사물에서 별 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심지어 그 차이를 인식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여행의 물리적 개념은 가상의 것을 그저 재확인하는 과정으로 대체되고 있다. 우리의 감각은 점차 무뎌진다. TV 안에서, 모니터 속에서.
어쩌면 위기일까?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러한 현실에서 떨어질 수가 없다. 시대에 속한 개인이 시대의 패러다임과 헤게모니를 벗어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오늘날 우리가 소통이라고 부르는 방대한 네트워크의 물결이 그 확장성에도 개인의 고독을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지만, 그 때문에 시대가 따르고 있는 방식을 일방적으로 내팽개친다면 그는 철없는 냉소주의자처럼 보이고 말 것이다. 백 년 전의 광활한 고독, 선택지조차 없던 시대의 관점에선 더욱더.
그러니 내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걸려 있던 거대한 십자가를 보고는 "저건 조토의 그림이야"라고 중얼거렸던 것을 부디 이해해 주길 바란다. 나 역시 이 시대에 태어날 걸 축복으로 여기는 현대인의 한 명으로, 감각으로 체험한 주관적 느낌보다는 머릿속에 미리 입력해 두었던 정보를 되뇌는데 열중하는 백과사전의 추종자에 불과할 따름이었으니. 따라서 난 저 십자가가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감흥을 주었을지, 지금 나에게 어떤 감흥을 주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저 '조토'라는 이름만을 언급하는 데 만족했다.
내가 미리 알아둔 정보를 입밖으로 꺼냈던 건 무엇보다도― 사르트르도 그랬었던 것처럼― "어리둥절하고 기진맥진하면서도 건성으로 아는 척하는 데서 모호한 기쁨"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그런 것이 바로 세상의 깊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사르트르도 부끄럽게 고백했었다. 하지만 그때의 사르트르는 어린아이였다. 작은 실수는 쉽게 용서되는 나이였다. 결국 "저건 조토의 그림이야"라고 했던 내 발언은 성인이 되어서도 완성되지 못한 내 정신의 결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이 당신의 알은체에 건성으로 반응한다면 주의해야만 한다. 그들은 당신의 치기 어린 정신을 이미 알아 보았으며, 그 유치한 태도에 못마땅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난 시끄러운 주변 상황 때문에 내 말이 들리지 않은 것으로 착각하고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저게 조토의 그림이야. 조토의 그림이라고. 조토의 그림이라니까?"
나의 그 야만적 정신은 스트로치 예배당에 들어설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 층 위로 올라서도록 되어 있던 그 예배당은 가운데에 놓여 있던 황금빛 제단화와 그 뒤의 유리창이 가장 눈에 띄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빛을 머금은 화려한 색채와 그 뒤를 삼면으로 장식하고 있던 빛바랜 벽화와의 대비는 그들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여행객들은 이 제단화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뒷 배경에,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모습을 감입해 넣은 스테인드글라스에 힐끗 눈길을 주고는 다시 계단을 통해 내려갔다.
그렇게 하여 스트로치 예배당의 벽면에 <심판의 날>과 <지옥>을 그려넣었던 옛사람들의 의도는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오늘날 여행객들은 그곳에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는다. 그래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심판의 날>과 <지옥>을 그려 넣은 '나르도 디 치오네'는 보티첼리처럼 유명하지 않았고, 그림은 보기에 좋지 않았으며, 화려하지도 않았고, 복원이 잘 되어 있지도 않았다. 따라서 그들에게 단 몇 초의 시선만을 허용하는 것엔 어떤 문제도, 아쉬움도 일어나지 않았다.
3.
14세기엔 흑사병이 여러번 창궐했다. 그 때문에 당시 주민들은 죽음을 그다지 멀리 있지 않은 것으로 인식했다.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분법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곧 당면할 죽음에 앞서 자신이 죄를 지을 경우 지옥에서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수도회는 당시의 분위기에 맞추어 종말론적인 단시들을 지었고, 성당의 벽에는 최후의 날과 지옥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프란체스코회의 자코미노는 <천상의 도시 예루살렘에 관하여>와 <지옥의 도시 바빌로니아에 관하여>를 썼고, 리바의 본베신은 <검은 성서>에 지옥에서 행해지는 12개의 벌에 관하여 기술했다. 본베신과 동시대인인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을 첫 번째로 묘사하였으니, 지옥은 때로는 공포를 조장하는 영원한 형벌로, 때로는 도덕적인 교훈으로 중세인들에게 제시되었다. 중세의 신자들은 최후의 심판과 지옥을 묘사한 그림 앞에 서서 앞으로는 절대 고해성사에 빠지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한 뒤 계단을 내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중세인이 아니었다. 내게 죽음이란 이미지는 저 멀리 있었다. 세계를 손쉽게 돌아다니는 즐거운 여행자였던 당시의 나는 더욱 그랬다. 나는 성당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호모 비아토르가 아니었고, 오히려 책이나 컴퓨터를 통해 미리 알아둔 것과 똑같은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탐정놀이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 유명하지 않은 회화나 조각에 눈길을 줄 필요가 없었다. 이것이 나만의 증상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이제 현대인은 심각하게 아프기 전에는 죽음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며, 죽음 이후에 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지옥은 두려운 공간이라기보다는 판타지라는 장르에서 묘사하는 다소 우스꽝스럽고 헛된 공간이 되었다. 지옥뿐만이 아니라 지옥에 대비되어 낙원의 이미지가 한층 강화되었던 천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성과 과학의 완전한 승리 덕택에 헛된 우상의 잔재들은 거의 관심조차 받지 못하게 되었고, 이제 그들은 그저 하나의 사실, 하나의 작품, 하나의 정보로 남았다.
14세기 시에나의 가타리나는 십자가에 매달린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예수를 생각하며 그 '영광스럽고 소중한 성혈'이 우리의 상처 위로 흘러내려 모든 아픔을 치유해주기를 바랐었다. 그처럼 눈앞에 보이는 잔인성에도 사랑이 표현되고 있다는 확신을 얻으려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6세기 뒤에 성당에 선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조각과 그림을 보며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다: "저건 브루넬레스키가 만든 조각이고, 저건 마사초가 그린 그림이지."
그런데 정말 그래서는 안 된단 말인가? 13세기의 탁발 수도회는 이단 재판을 관장했고, 교회는 유대인들의 가슴에 노란색 식별 표식을 달았으니, 타인에 대한 탄압은 대개 스스로를 올바르다 여기는 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것 아니었던가? 실은 그래서 예술가들이 열심히 묘사했던 지옥과 심판의 날에 대한 묘사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게 되었다. 지옥도는 머리 위에서 우리를 불태울 듯 위협했지만 각각의 관람자들은 자신만은 예외라고, 저기에 누군가는 가게 되겠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라고, 자신은 지옥이나 죽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버렸다. 게다가 편리하게도, 권력자와 자산가 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쉽게 자신들의 죄를 사면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지옥은 오직 약자들을 위한 것으로 떨어졌고, 그런 방식으로 현대인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흑사병이 온 사방에 퍼졌을 때 유럽인들에게 내려진 처방이란 의심지역에서 온 환자를 격리하고 병이 완전히 낫기 전엔 돌아오지 말라는 극단적인 조치였다. 그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이 심리적 질병을 퍼트린 자를 색출하겠다며 희생양을 찾아다니고 있다. 그 묵시록적 상황이 여전히 우리의 정신에 투영되어 있다. 언제나 재판당하는 자가 아니라 재판을 하는 자의 모습으로, 지옥을 가게 될 자가 아니라 지옥에 가게 될 자를 결정하는 존재로. 그리하여 단테가 <신곡> 지옥편에 썼던 첫 문장은 내게 더욱 큰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 어두운 숲에 처했었네."
단테는 자신이 어둠에 처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이 시대, 인터넷이 있어 다행이라고 외치는 이 시대는 올바른 길을 잃고서 어두운 숲에 처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이 가벼운 여행자는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심지어 지옥을 무섭게 감상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얼음 위를 나무로 지치며 나아가지만 얼음의 아래쪽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가볍게, 좀 더 빠르게 지나치라. 깨어진 얼음, 그 수렁으로 빠지기 전에, 그 차가움에 마비되기 전에,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해 생각해야만 하는 고통의 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그렇게, 거룩한 명을 받은 하나의 그림자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을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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