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서민들의 주거 공간은 건축과 조경, 실내 장식의 아름다움과 동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하루하루 살아남기 바쁜 공간에서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는 게 어불성설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집과 조경의 아름다움은 자산가들과 특정 지식층, 그리고 자본 예술가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상류 문화의 장식물로 오랫동안 여겨져 왔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혹은 어떤 부유한 이들의 건축물을 통해서만 건축미의 향유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미적 경험을 아주 전문적이거나 희귀한 것이라고 보았던 오랜 과거의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여전히 그 사고의 유효한 지배 하에 머물러 있다. 팝아트를 위시로 한 캠프 정신이 대중 예술의 저변을 잠식하고 있기는 하나, 건축과 조경 분야는 그 막대한 접근 비용 탓에 서민들에게서 여전히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캠프와 키치가 자본 친화적인 대중 문화이긴 하지만, 고급 자본만이 추구할 수 있다고 여기는 현대 예술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동경과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건축과 조경에서의 미의 추구를 문화적 엘리트의 사치스런 행위로 여기는 일반 시민들의 자조적인 경향에 반발이 없을 수는 없다. 비록 모조품에 불과하더라도 중세 유명 화가의 작품을 집안에 걸어두고 싶은 욕구가 존재한다면, 자신의 집과 마당 주변 역시 서투르게나마 (조금의 비용으로) 모방하고자 하는 욕구 역시 응당 생겨날 수 있다. 값비싼 재료의 사용, 제작자나 메이커의 유명세 같은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감정 세계를 외부에 드러내고자 하는 예술적 욕구는 시도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어떤 결과물들은 보잘것없다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겠으나 본디 예술이란 해석의 문제이므로 본인이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가 중요하다. 옛 비평가들은 라파엘 전파의 작품들을 혹독하게 비난했고, 영국인들은 1910년 후기 인상파의 첫 전시회를 보고 격분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의 몰취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동욱 교수가 저술한 <도산서당>에는 <선비들의 이상향을 짓다>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퇴계 이황이 건축한 도산서당에 선비들, 즉 퇴계가 생각한 어떤 관념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그 관념이란 그렇지 않아도 좁은 도산서당의 방 일부를 일부러 격리하여 비워둔 행위를 포함한다. 혹자는 퇴계가 방의 일부를 성리학적 이유로, 다시 말해 성현의 경전과 훈계를 등 뒤에 두는 것이 온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비워 둔 것에 마뜩잖아 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그 방을 말이다. 그러나 퇴계는 자신이 기거하는 공간을 그렇게 해석하길 원했다. 그런 그를 혹독하게 비난할 실용주의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번엔 그들의 몰취미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된 것이다.
퇴계 이황은 자신의 서당이 단순히 몸이 기거하는 곳이 아니라 정신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곳이 되길 바랐다. 자신이 추구하는 성리학의 틀이 일상생활에서도 배어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난 그 생각의 결과물인 도산서당을 서민 예술의 관점에서 보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당시 시대상으로 보자면 퇴계 역시 지배 계급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가 추구한 건축과 조경의 미는 다분히 서민적이었기 때문이다. 3칸에 불과한 크기, 짚으로 덮은 암서헌 동쪽 지붕, 질박한 기둥, 작은 연못, 수수한 화단. <도산서당>의 저자는 그러한 서당 건축과 주변 조경에서 자신을 치열하게 수양하고자 했던 선비의 모습을 찾으려 했다.
미의 추구는 누구에게나 어떤 형태로든 열려 있어야 한다. 그 형태는 작은 행위에서 시작될 수 있다. 가령 난 퇴계가 자신의 두루마기나 망건을 방바닥 아무대나 던져 두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퇴계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를 (감히 말하건대) 내가 옷을 아무대나 벗어 두지 않는 이유와 비슷할 것이라 여긴다. 아마도 퇴계는 예학의 정신을 따르기 위해, 그리고 나는 단순히 보기에 좋지 않기 때문에 옷을 제자리에 두려 했던 것일 테지만 두 의도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게 될 미의 방향은 동일하다고 믿는다. 그런 작은 태도가 생활상을 결정하고, 그 생활상은 양식을 만들어 내며, 그 양식이 건축을 통해 드러난다. <도산서당>의 저자가 도산서당에서 선비 건축의 미와 의의를 찾아내려 했다면, 난 그 과정에서 서민들 스스로 거부할 필요 없는 조형 예술의 당위성과 조우하게 되었다. 퇴계 이황이 추구하려고 했던 것은 자본주의적 예술이라 비난 받는 캠프와 키치가 아니었고, 사치스러운 놀이 취급을 받는 상류 예술도 아니었다. 검소하지만 아름다움이 살아 있는 소박한 건축물이 이미 500년 전에 이루어졌으니, 퇴계는 그곳에서 건축과 자연의 멋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날 그것의 재현이 불가능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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