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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현실이다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5. 10. 29.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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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십대 초반이었던 시절에 읽었던 한 단편 소설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어느 할머니가 사랑하는 손자와 함께 산에 갔다가 손자가 뱀에 물리고 말았는데, 독은 독으로 치료하는 게 좋다는 시장 상인의 말을 믿고 손자에게 복어를 먹였다가 오히려 손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내용이었다. 손자는 복어를 먹고 난 뒤 온몸이 마비되고 구토를 하다가 눈도 감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사랑을 다 할 수 없다는 가르침 이외에, 손자를 죽음으로 몰아버린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기억에 남았었다.

 

그런데 근래 여러 일을 겪다 보니 그 소설이 어린애들이 읽기에 좋은 감성적인 구석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손자를 죽음으로 몬 자신의 행동에 채찍질하며 슬퍼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이걸 현실적으로 각색하면 어떤 상황이 나타날까? 먼저 손자의 어머니가 나타나 할머니의 행동에 화를 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셨던 거에요!" 그럼 할머니가 노해 대꾸한다.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애 살려 보겠다고 하다가 그리 된 건데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해?" "어머니, 지금 뭘 잘 하셨다고 오히려 역정이세요?" "너는 이게 어른한테 할 태도냐? 그래, 내가 미안하다. 됐니?"

 

근 몇 년간 "이것이 현실이다"라는 걸 자주 느끼고 있다. 내가 읽은 것은 희망적인 소설이었던 셈이다. 현실은 위의 각색보다 더 냉혹하다. 누가 원론적 피해자인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상황 인식의 결여는 피해의 관심을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한정시킨다.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 피해자의 부모가 자신에게 욕하는 걸 보고는, "그렇게 욕하는 건 그럼 잘하는 행동이요? 당신이나 잘 하쇼" 하는 식이다. 이 범죄자의 지적은 잘못되었는가? 대부분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손가락질 받게 될 경우, 자신이 왜 손가락질 받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아주 쉽게, 할머니와 범죄자의 말을 답습한다. 그렇다. 이것이 내가 처해 있는, 피하고 싶은, 그러나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끔찍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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