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 그러나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근 들어 더욱 그랬다. 과거에 썼던 글을 읽어보면 이어지지 않은 단어 하나가 보였고, 연결되지 않은 문장 하나가 보였으며, 마무리 짓지 못한 감정 하나가 보였다. 내 글을 보면 어지러운 책상이 떠올랐다. 다신 읽어보고 싶지 않은 서류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그런 책상. 이사를 하거나 방 정리를 하다 보면 휴지통으로 들어가게 되는 그런 종이 조각들이 대합실의 소음처럼 쌓여 있었다. 창조나 감정이나 예술성, 하다 못해 지적인 오락조차도 느낄 수 없는 글들이 처리하기 곤란한 짐처럼 어슬렁거렸다. 적요로운 울음이 있어 발광하는 모니터 앞에서 두근거리는 손가락으로 자판을 눌러댔지만 연이어 황색의 토사물을 뱉어내는 하늘과 호흡 곤란을 느끼는 개망초, 두통을 호소하는 개나리의 시름을 달리 말할 방도가 없었다. 그만큼 유목하는 인간이 되는 건 불편했다. 유목하는 인간들은 이런 글을 쓴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혹은 "내 안에선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열광과 칠장이의 연설에 대한 경악이 서로 싸우고 있다." 혹은 "인생의 폐허여! 내 가족이여! 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두뇌여! 나는 저녁마다 그대들에게 엄숙한 고별을 보낸다. 하나님의 무서운 손톱에 짓눌린, 팔순의 이브들이여, 내일이면 그대들은 어디에서 방황하려나?"
하지만 난 가방 안에 사막을 위한 물병을 숨겨놓을지언정 유목하지는 않았다. 물병, 그건 단지 한때나마 사막을 꿈꾸었다는 상징일 뿐이었다. 언젠가는 앓아야만 하는, 사라져야 할 상징.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죽을 때 편지를 쓰는 것처럼 글을 썼지만, 결국은 죽지 않았으므로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들어 할 수 없었다. 오늘도 나는 요상한 낱말의 뭉치를 끊임없이 나열한다. '너는 동물원의 낙타가 아니더냐.' 적응된 철장과 인간들의 환호 속에서의 서커스 같은 삶. 해질 녘, 석양의 뜨거움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다 이내 쥐어진 몇 장의 푸른 여물통에 다시 머리를 박는다. 나는 유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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